[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대추 한 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23일 03시 00분


대추 한 알 ― 장석주(1955∼ )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좋은 시인이 지닌 몇 가지 덕목이 있다. 그중의 하나는 ‘관찰 잘하기’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세상 만물을 당연하지 않게 보라. 이것이 시를 쓰는 출발점이다. 그런데 흔한 것을 새롭게 보라니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읽어 보면 대번에 짐작할 수 있다. 작은 대추 한 알로 꽉 채워져 있는 이 시는 대추를 잘 관찰해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원래 대추는 비싸고 귀한 과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시를 읽고 나면 생각이 바뀐다. 비싼 것이 대수일까. 그와 상관없이 분명 대추는 귀하고 장한 과일임에 틀림없다. 시인은 그 증거들을 조목조목 찾아냈다. 대추는 지금 한창 익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익는 것이란 얼마나 장한 일이냐. 태풍, 천둥, 벼락, 번개를 대추는 비명 하나 없이 견디어 냈다. 고생을 견딘 대추는 붉게 익을 수 있었다.

 대추의 모양이 점점 둥글어 가는 것 또한 몹시 장한 일이다. 누가 재촉한 것도 아닌데 대추는 저 혼자 열심히 크고 있다. 무서리와 땡볕과 초승달을 꿀꺽꿀꺽 먹고 대추는 둥실둥실 자라났던 것이다. 고맙고 기특한 일이다. 시인은 감탄과 경외감을 담아 대추에게 말을 건넨다. 너는 대단하구나, 너는 세상을 잘 살아냈구나.

 이쯤 되면 이 시가 대추에서 시작하지만 대추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세상의 쓴 것과 단 것을 제 안에 품고 자라나는 모든 존재는 훌륭하다. 엄마가 일해도 무럭무럭 자라주는 아이는 벌써 훌륭하다. 취업하려고 애쓰면서 자책하는 젊은이는 이미 훌륭하다. 많은 것을 잃어가며 세상을 알아가는 어른들 역시 훌륭하다. 천둥 같은 시련에 붉어진 얼굴과, 땡볕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깨는 훌륭하다. 믿지 못하겠거든 대추를 바라볼 일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대추 한 알#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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