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 Opinion] 정치적 입지 따라 전문가 견해 바뀌면 안 돼

  • 동아닷컴
  • 입력 2016년 10월 24일 14시 18분


정치에 의한 과학의 실종

10월 23일 고 백남기 씨의 시신 부검영장을 집행하기 위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은 홍완선 종로경찰서장(오른쪽)이 강제집행에 반대하는 정의당 윤소하 의원(왼쪽에서 두 번째) 및 투쟁본부 관계자들과 대치하고 있다.
10월 23일 고 백남기 씨의 시신 부검영장을 집행하기 위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은 홍완선 종로경찰서장(오른쪽)이 강제집행에 반대하는 정의당 윤소하 의원(왼쪽에서 두 번째) 및 투쟁본부 관계자들과 대치하고 있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현 하트웰의원 원장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현 하트웰의원 원장
2008년 이른바 광우병 사태가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미국 쇠고기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송송 뚫리는 광우병에 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제는 거의 없다. 그런데 당시에는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광우병 공포에 떨었을까.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감춰졌기 때문이다.

당시 국제무역사무국(IAE)에서 집계한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광우병을 진단 받은 소는 19만297마리였다. 이중 미국 소는 몇 마리였을까. 단 3마리뿐이었다. 그나마도 한 마리는 캐나다에서 수입한 소여서, 미국 땅에서 자란 소 중 광우병에 걸린 소는 단 두 마리였다(그래서 미국의 광우병 소는 감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유전자변형에 의한 산발성 광우병으로 추정됐다).

광우병의 유병률은 미국소의 광우병 위험도를 알기 위해서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할 기초적 통계다. 그러나 이 간단한 기초적 통계는 광우병이 대한민국을 휩쓸 당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당시 '미국소 수입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와 집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이 수치를 알았더라면 생각이 바뀌었을지 모른다.

과학은 '팩트(사실)'다. 팩트가 사라진 것은 과학이 사라졌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광우병 사태는 정치에 의해 과학이 실종된 사례다. 정치가 과학을 집어 삼키자 혼란이 발생한 것이다. 고(故) 백남기씨 사건도 다르지 않다.

지난해 시위 도중 물대포에 맞아 쓰려졌던 백씨가 얼마 전 사망했다. 그의 사망 사건은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 됐고, 대한민국 사회는 다시 둘로 나뉘어 공방을 벌인다.

사망진단서가 잘못 쓰였다며 서울대 의과대 학생들과 총동문회에서 성명서를 발표했고, 서울대병원은 이례적으로 사망진단서 때문에 특별조사위원회(위원장 이윤성 교수)를 구성했다. 또한 치료를 담당했던 주치의 백선하 교수는 국회 국정감사장에 섰다. 그러나 논란만 거듭될 뿐 명쾌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의사들도 둘로 나뉘어 어떤 이는 주치의를 응원하고 어떤 의사는 주치의를 질타한다. 부검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이윤성 특별조사위원장은 "외인사이며 부검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힌 반면 진보성향 단체인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사들은 "외인사이며 부검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전문가인 의사들 사이에서도 상반된 주장이 나오니 일반 시민은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정치적 논란은 그렇다 치더라도 의학적 논란은 바람직하지 않다.

백씨는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고 뇌출혈(경막외출혈)과 안와골절, 광대뼈골절 등 다발성 손상을 입은 것이 확인됐다. 뇌출혈에 대한 수술을 받았으나 의식을 되찾지 못한 상태에서 신장기능부전으로 사망했다. 쓰러진 지 317일 만이다. 정치를 일절 배제하고 의학적 관점에서만 이 사건을 바라보면 결론은 단순하다.

주치의가 뭐라고 주장하든, 사망진단서가 대한의사협회에서 만든 작성원칙에 어긋나게 작성됐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작성원칙에는 사망원인에 대해 '심폐정지'와 같은 사망의 양식을 적지 말라고 돼 있으며, 외적 요인의 합병증으로 사망했을 경우 사망의 종류를 병사가 아닌 외인사로 적도록 돼 있다. 그런데 백씨의 사망진단서는 이 원칙을 어겼다.

물대포로 사람이 죽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물대포를 맞아 사망한 사례가 많이 보고됐다. 물대포로 인해 안와골절(안구를 둘러싼 뼈의 골절)이 발생할 수 있는가? 가능하다. 2013년 독일에서 그런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그렇다면 부검은 필요한가? 의학적 관점으로만 본다면 필요하다. 물대포에 의한 안와골절 발생사례 보고 건수는 전 세계적으로 단 한 건밖에 없다. 하지만 물대포에 의한 광대뼈 골절 사례는 아직 보고된 바 없다. 물대포에 의해 안와골절과 광대뼈골절이 동시에 발생할 수는 있지만 그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다른 원인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의학적 관점이다. 그리고 인체 부검은 그림자를 통해 짐작하는 영상검사들보다 훨씬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

만일 누군가 "주치의가 발급한 사망진단서가 대한의사협회의 사망진단서 작성지침을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만일 누군가 "안와골절과 광대뼈골절은 주먹의 타격보다 물대포에 의해 더 쉽게 발생한다"라고 주장하거나, 만일 누군가 "부검하는 것보다 CT나 MRI 등 영상검사가 더 정확하다"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적어도 의학적으로 옳지 않다.

정치와 달리 의학은 확률이라는 숫자를 기준으로 판단의 옳고 그름을 구분한다. 성공확률이 각각 50%와 80%인 두 가지 치료법이 있다면 80%인 치료법을 선택하는 것이 의학적으로 옳은 선택이다. 의료에는 좌와 우가 없어야 하며 정치에 휘둘리지도 않아야 한다. 의사가 자신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의학적 사실에 대해 다른 의학적 견해를 가져서도 안 된다. 의학은 과학이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현 하트웰의원 원장
#백남기#물대포#매거진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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