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4대 강국은 모두 역대 최고 수준의 강력하고 안정적인 지도자의 리더십을 갖추게 됐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자국의 국가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열강들의 국제정치적인 원심력은 그 어느 때보다 커질 것으로 예측된다.
4대 열강의 합종연횡 움직임은 한반도의 미래에 짙은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 동중국해 문제 등을 놓고 충돌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은 트럼프가 대선 과정에서 암시한 고립주의적 대외정책을 현실화할 경우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 내에 자국의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최고로 높이겠다는 움직임을 보일 것이 분명해 보인다. 러시아 역시 새로운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를 꾀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과 아시아는 북한 문제에 공조하고 있고 일본은 영토 문제를 놓고 러시아와 밀월 관계다.
이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 환경이 하루가 달리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 농단이라는 미증유의 스캔들로 동력을 상실해 국정 공백이 장기화되고 있다. 한반도 주변국의 ‘슈퍼 스트롱 맨’들이 벌이는 한반도와 동아시아 패권 경쟁이라는 체스 판에서 한국은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될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 국내 지지율 탄탄한 4강 정상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층인 성난 백인 남성(앵그리 화이트 맨)과 공화당 지지자들이 요구하는 강력한 대외정책을 밀어붙일 기반을 탄탄하게 마련했다. 백악관은 물론이고 연방 상원과 하원까지 싹쓸이한 트럼프는 민주당의 저지를 뿌리칠 권력구조를 부여받았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집권 3년을 지나면서 더욱 공고한 권력 집중화를 이뤄냈다. 시 주석은 이미 대선배인 덩샤오핑(鄧小平)을 넘어 마오쩌둥(毛澤東)의 권력에 근접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폐막한 중국 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18기 6중전회)에서 발표된 ‘공보’(公報·결과문)에서 시 주석에게 ‘핵심(核心)’이라는 칭호가 부여된 것은 시 주석의 공고한 입지를 그대로 보여 준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2021년 8월까지 임기를 연장해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 국내 보수 진영의 든든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포스트 아베’의 부재와 지리멸렬한 야당 덕에 국내 지지율이 60%를 웃돌 정도로 안정적인 집권 기반을 다진 상태다.
‘원조 마초 맨’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 내내 미국과 대립해 오면서 국내에선 오히려 지지 기반이 강화됐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은 85%에 육박한다. ○ 트럼프 대외정책의 불확실성에 촉각
이들 4대 강국의 정상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일 권력투쟁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직은 가늠하기 어렵다. 변화의 시발점인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 특히 대(對)아시아 정책이 아직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워 과거보다 미국의 대외적 개입을 줄일 가능성을 암시했지만 동시에 ‘강한 미국의 재건’을 주창하고 있다. 필요에 따라서는 미국의 힘을 과시하거나 탄력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지지층의 성향으로 볼 때 미국이 오바마 행정부 때보다 대외 개입을 줄이거나 선택적으로 할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여론조사 기관인 퓨리서치가 5월 실시한 조사 결과 미국인의 57%는 “미국은 국내 문제에 더 신경 써야 하고 다른 나라 일은 (그들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야 한다”고 답했고, 37%만이 “미국이 글로벌 분쟁에 개입해야 한다”고 답했다.
중국과 러시아 등 경쟁 상대국이 있는 상황에서 무모한 고립주의는 국제정치 무대에서 미국의 국익을 훼손한다는 점에서 ‘미국을 다시 강하게 만들겠다’는 공약과 배치되는 것이다. 브루킹스연구소는 최근 ‘트럼프 독트린’은 고립주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 선택적으로 개입하는 제한적 고립주의를 선택할 가능성이 점쳐진다고 밝힌 바 있다.
아시아의 경우도 트럼프는 중국의 굴기(굴起)를 막기 위해 남중국해에 미국의 군사력을 증강 배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단 개입을 하더라도 미국의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협상을 통해 해당 지역 동맹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는 게 트럼프가 달고 있는 전제 조건이다. ○ 트럼프-시진핑 충돌 불가피
중국은 일단 신중한 반응을 나타냈다. 시 주석은 9일 트럼프 당선인에게 축하전문을 보내 건강하고 안정적인 중미 관계 유지를 위해 공동 노력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는 “나는 중미 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당선인과 함께 이런 노력을 해나갈 것을 기대하며 서로 충돌하거나 맞서 싸우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며 미중 양국이 서로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고 공존하는 ‘신형 대국관계’를 강조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중 관계의 갈등 고조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시 주석은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 행정부와 아시아권에서의 패권 경쟁에 뛰어들 게 확실하다. 대선 기간 내내 중국을 ‘일자리 강도국’ ‘환율조작국’으로 비난해 온 트럼프가 경제 전쟁을 걸어올 경우 응전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반도 배치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질 미중 격돌의 첫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차원의 대북제재 과정에서도 한국의 참여 정도를 놓고 미중 간 신경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트럼프 취임 초기부터 한국은 시진핑과 트럼프라는, 과거 미중의 어느 정상보다 마초 기질이 강한 두 슈퍼파워를 상대로 국운이 걸린 힘든 줄타기를 해야 할 형편에 놓여 있다. ○ 기대 큰 아베와 푸틴
이에 비해 아베 총리는 한층 강화된 국정 장악력을 발판으로 오바마 행정부에서 조성된 한미일 3각 동맹을 넘어 한국을 제치고 ‘신(新)미일 밀월 관계’를 한층 강화하려는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아베 총리는 트럼프의 우세가 확연해지자 즉각 보좌관을 미국에 급파하고 아베 총리 본인도 17일 뉴욕에서 트럼프 당선인을 만나기로 하는 등 기민하게 대처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과 시리아 내전으로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국들과 러시아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지만 동시에 푸틴 대통령은 일본, 터키, 인도 정상과 잇달아 회담을 갖고 있다. 결정적으로 자신에게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트럼프까지 당선되면서 숨통이 트였다.
푸틴 대통령은 9일 트럼프 당선인에게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전문을 보내 “위기 상황에 처한 미-러 관계 개선, 국제 현안 해결, 국제 안보 도전에 대한 효율적 대응 방안 모색 등에서 공동 작업을 해나가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 한국 외교, ‘퍼펙트 스톰’에 갇히나
이런 가운데 트럼프는 당선 직후 박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대선 기간 보여준 것과는 다른 인식을 보였다. 하지만 동맹관계 재정립, 협상을 통한 최선의 결과물 도출을 우선시하는 트럼프 당선인이 취임하면 한미 동맹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국면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게 워싱턴 외교가의 관측이다.
특히 박 대통령의 흔들리는 리더십과 지속되는 북핵 위기를 틈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 등 자신의 핵심 공약을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강하게 밀어붙일 경우 이를 방어할 명분이나 외교적 기제가 마땅찮은 게 현실이다.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국정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이 전례 없이 강한 주변국 정상들의 압박과 요구에 민낯 그대로 노출될 상황에 빠졌다”며 “한 번도 겪지 못한 ‘퍼펙트 스톰’이 기다리고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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