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K-pop)을 이끄는 뮤지션들의 비주얼 디렉팅을 담당해온 김대홍 아트 디렉터와 윤연재 디자이너. 작업실의 낡은 자개 밥상은 그들이 추구해온 가치 그 자체였다.
서태지, 백지영, 휘성, 씨스타, 지코, 여자친구, 프라이머리, 세븐틴…. 너무 많아 전부 열거하기도 힘든 이 가수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앨범 재킷 디자인이 바로 김대홍(32) 아트 디렉터와 윤연재 디자이너(28)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김대홍 디렉터는 2008년부터 다이나믹 듀오가 속해 있는 힙합 레이블 아메바컬쳐에서 일을 시작해 재작년에는 윤연재 디자이너와 함께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스튜디오인 타다스튜디오를 설립했다. 타다스튜디오의 주된 작업은 다양한 장르의 앨범 재킷 아트 디렉팅이지만 글로벌 기업과의 콜래보레이션, 스타트업 기업을 위한 브랜딩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그들을 만난 곳은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작업실. 아티스트의 작업실이라고 하면 으레 대단한 예술 작품들이 걸려 있을 것 같지만 이들의 작업실은 생각보다 단출했다. 얼핏 보기에도 낡은 듯한 자개 문양의 밥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김대홍 디렉터는 “누군가가 요 앞 아파트 상가에 버린 것인데 문양이 독특하고 예뻐서 주워 왔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간의 작업물들을 보고 싶다고 하니, 그는 작업실 한쪽에 있는 캐비닛에서 여러 장의 CD들을 한가득 꺼내왔다. 2014년 5년 만의 컴백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던 서태지의 앨범과 마치 황제를 연상시키는 듯한 콘셉트로 화제를 모았던 블락비 지코의 솔로 앨범, 또 대세 걸 그룹으로 불리는 여자친구의 앨범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개성 강한 톱 스타들의 앨범이다. ▼굉장히 많은 뮤지션들과 작업을 했네요. 앨범 재킷 디자인이라는 게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분야인 것 같아요.
김대홍(이하 김)_주로 연예기획사를 통해 의뢰가 들어와요. 물론 뮤지션이 개별적으로 요청해오는 경우도 있고요. 클라이언트와 앨범 재킷이나 수록곡들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 비주얼 콘셉트를 잡죠. 이후에 인쇄와 판매까지 담당하는 것이 저희가 하는 일이에요.
윤연재(이하 윤)_타다스튜디오가 하는 일은 클라이언트가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시각적으로 구체화시키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 김대홍 디렉터가 업계에서 인지도가 높다 보니 앨범 재킷 작업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그 외에도 가수의 콘서트 오프닝, 특정 제품과의 아트 콜래보레이션 등을 진행하고 있죠. ▼ 아트 디렉팅이라는 일을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예요.
김_전문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했어요. 막연하게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생각은 했는데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하더라고요. 군대에 다녀오고 경험이나 좀 쌓아볼까 싶어서 홍대에 위치한 옷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지금은 힙합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브라운브레스’라는 브랜드인데, 그때만 해도 그래픽이 그려진 티셔츠가 전부인 작은 스토어였죠. 어느 날 가게 사장님이 아메바컬쳐에서 비주얼을 담당해줄 사람을 구한다면서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해주셨어요. 그걸 계기로 이쪽 업계에 발을 들였죠.
윤_저 역시 그 가게에서 김대홍 디렉터를 처음 만났어요. 저는 가게 손님이었죠(웃음). 홍익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는데,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서로 작업한 것들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친해진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대만의 무역회사에서 1년 정도 일했어요. 그만두고 쉬고 있던 차에 마침 아메바컬쳐 일을 그만두고 나온 김대홍 디렉터에게 연락이 와서 타다스튜디오를 함께 만들게 됐죠.
▼ 4년 간 일한 아메바컬쳐에서 나오게 된 이유는 뭔가요.
김_제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아메바컬쳐는 아주 소규모 레이블이었어요. 소속 가수라고 해도 다이나믹 듀오밖에 없었고, 프라이머리가 막 데뷔를 준비하는 시점이었죠. 회사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미래에 대해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회사는 좀 더 몸집을 불리겠다는 입장이었고, 저는 소규모로 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으니까요. 이후 대형 연예기획사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기도 했는데 소규모로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서 가지 않았어요. 회사 안에 있을 땐 힘들다고 투정도 많이 부렸는데 직접 나와 보니 세상은 더 험하더라고요(웃음). 일을 하면서 배울 수 있었던 회사였기에 감사한 마음이 많아요.
윤_지금은 회사에 있을 때보다 복잡하고 힘든 게 당연해요. 회사에선 특정 아티스트와 작업을 연속적으로 할 수 있지만, 회사를 나온 지금은 다양한 장르, 다양한 캐릭터, 다양한 스타일의 뮤지션들과 작업을 해야 하니까요. 아트 디렉팅 외에 따로 챙겨야 할 일들도 많아졌고요.
▼ 뮤지션에 따라 작업 방식도 다르지 않나요. 자신의 앨범에 대한 생각이 확고한 가수가 있는가 하면, 디렉터가 제안한 것을 잘 받아들이는 가수도 있을 것 같아요.
김_크게 나누자면 그렇게 두 부류예요. 보통 대형 기획사에서 기획형으로 나온 그룹들은 회사나 디렉터가 제안한 방식을 따르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뮤지션으로서 자신의 음악적인 색깔이 확고한 분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야기해요. 2014년에 9집 앨범을 함께 작업했던 서태지 씨는 후자의 경우죠. 한 전시회에서 제가 그린 그림을 보고 서태지컴퍼니에서 연락을 하셨어요. 곧 아이가 태어날 예정인데 그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으로 앨범을 만들고 싶다면서 곧 태어날 소녀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하셨죠.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정말 빈틈이 없는 뮤지션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관이 뚜렷한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밀고 나가는 실행력까지 갖춘 뮤지션이었죠.
윤_무엇보다 중요한 건 뮤지션과 아트 디렉터 간의 소통이에요. 작년에 데뷔한 보이 그룹 세븐틴은 멤버들이 연습실 생활을 할 때부터 곁에서 지켜봐왔어요.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보니 작업을 할 때 정말 재밌었어요. 결과도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었죠. 요즘 세븐틴은 각종 어워드에서 신인상을 휩쓸고 있어요. 덕분에 앨범도 리패키지해 나오게 됐고요. 저희가 작업한 것들 중 가장 판매량이 많은 앨범이에요.
김_지코의 솔로 앨범도 그의 작업실에서 치킨을 먹다가 생각해낸 아이디어예요(웃음). 지코가 한편에 있던 다양한 피규어들을 가리키며 “이 친구는 동부의 왕이고, 저 친구는 서부의 왕”이라고 설명을 하더라고요. 지코의 본명이 우지호인데 한자로 써보면 ‘임금 우’씨기도 했고요. 마침 몸에 한국어 문신을 조금씩 새기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조선의 마지막 임금 콘셉트로 앨범 커버를 디자인해보면 어떨까” 하고 제안했죠. ▼ 두 분에게 영감을 주는 건 무엇인가요.
김_저는 주로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영감을 얻어요. 친구가 무언가를 좋아하게 됐다고 하면 그게 무엇인지, 어떤 점이 좋은지를 관심 있게 물어보고 대화를 나누죠. 누군가에겐 시답지 않은 농담이겠지만, 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새롭게 얻은 정보들을 스스로 찾아보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과 결합해 다른 어떤 것을 만들어내곤 하죠.
윤_저는 제가 지금껏 쌓아온 과거의 경험들을 역추적해서 도움을 받는 편이에요. 어릴 때부터 사진 찍는 걸 굉장히 좋아했는데, 사진들을 버리지 않고 다 정리해서 모아두었거든요. 전에 찍은 사진들을 다시 훑어보면 그 시절에 제가 무엇에 빠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어요. 진짜 좋은 건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블락비의 〈블루밍 피리어드〉이라는 앨범 커버 사진도 사실은 제가 10년 전에 찍은 거예요. 다시 꺼내어 보니 그 사진이 새롭고 아름답게 느껴지더라고요. 이 업계는 무조건 트렌디해야 한다고 하지만, 결국 정답은 과거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걸 끄집어내는 작업을 하는 거죠. ▼ 요즘엔 어떤 것에 빠져 있나요.
김_요즘 들어 한국적인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우리가 작업한 앨범이 한류를 타고 세계로 뻗어나가잖아요. 우리야 외국의 것이 이국적이고 세련됐다고 느끼겠지만, 해외 팬들에게도 과연 그게 통할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 거죠. 그래서 한국 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찾아보고 스스로 그려보기도 했어요. 특히 운보 김기창 선생님의 작품에 푹 빠져 있어요. 한국 여성을 굉장히 아름답게 표현한 점이 인상적이었죠.
윤_저는 평소 여행을 굉장히 좋아해서 많은 나라들을 가보려고 하는 편인데, 언젠가 문득 여행을 즐기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여행 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귀국 후 현관문을 들어서는 순간이더라고요. 익숙했던 것이 새롭게 느껴지는 게 좋은 거예요. 요즘은 디렉터와 함께 고가구와 고택을 돌아보는 일들도 하고 있어요. 오래도록 제 곁에 머물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새롭게 느끼는 방법을 고민하는 중이거든요.
▼ 결국 두 분은 어떻게 브랜딩할 것인가에 대해 디렉팅을 하는 셈인데, 두 분이 생각하는 셀프 브랜딩의 노하우는 뭔가요.
윤_공장에서 찍어낸 기성품은 넘쳐나잖아요. 하지만 대중에게 인정받고 트렌드를 이끄는 상품은 자신만의 색깔로 표현해낸 것들이에요. 셀프 브랜딩도 똑같아요. 자기 자신을 얼마나 잘 아는지가 가장 중요하죠. ‘남들은 이렇대’라는 말로 비교할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김_돌이켜보면, 저는 학창 시절에 산과 들로 놀러 다니면서 그저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살았어요. 미술 기법도 학창 시절에 습득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일을 하면서 필요에 의해 배웠죠. 하지만 예술적인 감수성은 정형화된 길을 답습하지 않고 제 스스로의 길을 개척했기 때문에 체득했다고 봐요. 제가 아트 디렉터라는 명함을 가질 수 있는 것도 결국 일찍부터 남들과는 다른 길을 갔기 때문이에요.
두 사람의 작업실에 남이 쓰다 버린 낡디낡은 밥상이 놓여 있는 이유가 그제야 이해가 됐다. 빠르게 흘러가버리는 세상 속에서, 시간이 지나도 계속 곁에 두고 싶도록 포장하는 기술. 쉬이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일상에서 소중함을 잡아내는 일. 김대홍 디렉터와 윤연재 디자이너의 지향점이자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포인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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