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연착이 하도 잦아서 요즘은 출근길에 지하철이 제시간에 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서울 용산구에 사는 직장인 임모(31) 씨의 말이다. ‘시민의 발’이라 불리던 지하철이 최근 잦은 연착과 사고로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다. 버스나 택시 등 다른 대중교통수단과 달리 차량 정체 등의 영향을 받지 않아 정시 도착이 가능하다는 지하철의 이점이 사라지고 있는 것. 선로전환기 고장, 차량 고장, 송전 문제 등 연착 이유도 많아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지경이다.
지난해 서울지하철 2호선 구의역 사고부터 계속 지적되던 스크린도어 안전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여전히 스크린도어 관련 인명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기 때문. 서울시와 서울메트로 등 주무기관은 스크린도어 사고 해결책을 다양하게 내놓고 있지만 현장에 제대로 적용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시민은 불안하고 답답해도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 툭하면 멈추는 지하철
4월에만 지하철 연착 사고가 4건 있었다. 선로전환기 고장, 차량 고장, 신호기 이상 등 여러 이유로 지하철이 멈춰 섰다. 3일에는 서울지하철 7호선 부평구청행 열차가 오전 7시 45분 도봉산역에서 고장 나 30분가량 출발이 지연됐다. 6일에는 석바위시장역에서 인천시청역으로 향하던 인천지하철 2호선 열차가 선로전환기 제어시스템 고장으로 멈췄다. 이후 열차 운전을 수동으로 전환해 운행이 재개됐지만 후속 열차들은 5~20분가량 연착됐다.
4월 12, 14일에는 서울지하철 4호선이 말썽이었다. 12일에는 열차 고장으로 산본역~금정역 구간에서 20분간 지하철이 멈춰 섰다. 14일에는 열차로 공급되는 전기가 차단돼 오전에는 반월역~상록수역 운행이 20분 남짓 지연됐고, 저녁 8시 40분 무렵에는 안산역으로 들어오던 열차가 갑자기 멈췄다. 열차가 역 승강장에 들어서기 전에 멈춰 승객들은 철로를 따라 수백 미터를 걸어야 했다. 이 사고로 경기 안산 상록수역에서 시흥 오이도역까지 9개 구간 운행이 3시간가량 중단됐다.
4월 14일 사고 당시 안산행 지하철을 기다리던 대학생 김모(28) 씨는 “서울에서 안산 방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하철이 멈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단시간 내 해결될 것 같지 않아 결국 버스를 수차례 갈아타고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퇴근시간이라 차도 막혀 평소보다 귀가가 늦어졌다”고 말했다. 직장인 백모(24·여) 씨도 “전광판과 열차 내 방송에서 ‘4호선 전 차선 장애 조치로 운행이 지연되고 있다’는 안내가 나왔다. 중간에 지하철이 아예 멈춰버릴까 봐 두려워 내려서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고 밝혔다.
서울 및 수도권을 잇는 다른 지하철 호선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은 지하철 연착 사고가 생기기 때문.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31일 기준 서울지하철 하루 승객 수는 약 799만 명으로 서울시 인구(약 1020만 명)의 80% 수준이다.
게다가 2014년 서울시의 ‘통근·통학 시 이용하는 교통수단’ 조사에 따르면 서울로 출퇴근 및 등하교를 하는 인원 가운데 30.9%가 지하철을 이용한다. 따라서 출퇴근시간에 지하철이 늦어지면 지하철을 이용하는 직장인과 학생이 큰 불편을 겪곤 한다. 특히 서울지하철 2호선은 1월부터 3월까지 매달 한 번씩 고장으로 연착했을 정도로 운행 지연이 잦다. 등하교 시 2호선 지하철을 타는 대학원생 이모(26·여) 씨는 “2~3년 전부터 부쩍 지하철 연착이 잦아졌다. 특히 출근시간에는 2~3분이 기본이고 5~10분가량 늦는 경우도 한 달에 한 건 정도는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 결국 문제는 노후화된 설비
서울지하철 1~4호선을 운영 및 관리하는 서울메트로는 지하철 고장이 잦은 이유가 차량 노후화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서울메트로 관계자는 “열차의 출력 부족이나 차량 기계 고장은 물론, 신호기 이상도 결국 오래된 차량 탓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신형 차량은 내부 시스템이 차간 간격을 자동으로 조정하기 때문에 선로 신호기 없이도 원활한 운행이 가능하지만, 구형 차량은 신호기를 보고 수동으로 차량 간격을 조정해야 해 신호기가 고장 나면 지하철 운행이 지연될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지하철의 노후화는 심각한 수준이다. 서울메트로가 지난해 12월 31일 전수조사한 전동차 사용 연수 현황 발표에 따르면 1~4호선 전동차 총 1954대 가운데 21년 넘게 운행한 차량은 1184대로 60.6%에 달했다. 1호선은 전체 전동차의 40%, 2호선과 3호선은 각각 60%와 30.6%가 철길을 달린 지 20년이 넘었다. 4호선은 모든 전동차(470대)가 20년 이상이었다.
이렇게 오래된 지하철이 계속 철길을 달리는 이유는 전동차 사용 햇수 제한인 내구연한이 매년 늘어났기 때문. 국내 전동차의 내구연한은 철도안전법 제정 당시 15년으로 정했지만 1996년 25년, 2000년 30년, 2009년 40년으로 점차 늘어나다 2014년에는 규제완화 정책의 일환으로 아예 없어져버렸다.
물론 한국에 비해 전동차를 더 오래 쓰는 나라도 많다. 미국과 독일은 전동차의 최소 내구연한이 40년이며, 일본과 영국은 따로 전동차 내구연한을 정해놓지 않았다. 해외처럼 국내에서도 합리적인 전동차 운영이 필요하다며 전동차 내구연한이 사라졌다. 비용 절감을 위해 20~30년 된 노후 전동차도 부품만 제때 교환하면 계속 달릴 수 있게 된 것.
그러나 다른 나라의 오래된 전동차와 달리 유독 한국 전동차만 고장과 사고가 잦은 원인은 부품 교환에 있었다. 일본은 전동차 부품을 15년마다 무조건 교체하지만, 국내에서는 교체 없이 3년 주기로 점검하는 정도다. 김철수 한국교통대 철도차량시스템공학과 교수는 “40~50년을 사용하는 해외 전동차는 부품 내구연한을 정해 내부 전기설비와 부품을 완전히 교체한다.
이 때문에 외형은 오래됐을지 몰라도 전동차를 움직이는 부품은 새 전동차 못지않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전동차 부품의 교체 주기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게다가 겉으로 보이지 않는 전력 전달 장치 및 전기설비는 특히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출력 부족 같은 사고로 미뤄보면 점검 및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서울시와 서울메트로는 전동차의 잦은 고장을 해결하고자 대대적인 노후설비 교체에 나섰다. 서울시는 21년 이상 장기 사용 전동차 가운데 2, 3호선 610대(2호선 460대, 3호선 150대)를 예산 8370억 원을 투입해 2022년까지 신규 차량으로 교체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시 관계자는 “1호선 전동차 64대는 2015년 리모델링을 완료해 정밀진단 결과 15년 연장 사용이 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4~8호선 전동차는 연차별 정밀안전진단을 거쳐 추가 교체 및 정비 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밖에도 서울시는 2030년까지 개통 후 40년이 지난 1~4호선 선로와 열차신호설비 등 7개 분야 21종의 노후시설수리와 120개 노후역사 리모델링에 총 2조20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할 예정이다.
● 고장이 일상, 스크린도어
지하철 스크린도어도 도입 이후 계속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지하철 이용객의 안전을 위해 스크린도어를 설치했어도 승객이 선로에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하거나 심한 경우 스크린도어 때문에 승객이 사상하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4월 14일 오전 6시 48분 서울지하철 1호선 의정부역에서 50대로 추정되는 한 남성이 선로에 내려가 열차와 충돌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로 1호선 지하철 운행이 약 25분간 중단됐다. 의정부역에는 스크린도어가 설치돼 있지만 스크린도어가 제구실을 하지 못한 것. 경찰은 폐쇄회로(CC)TV를 분석해 이 남성이 어떻게 스크린도어를 넘어 선로로 내려갔는지 파악 중이다.
지난해 5월 서울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김모(19) 군이 사망한 사고로 스크린도어 안전 문제가 불거져 서울시와 서울메트로가 같은 해 6월부터 전수조사를 하는 등 대응에 나섰으나 스크린도어 사고는 근절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도 서울지하철 5호선 김포공항역에서 회사원 김모(당시 36) 씨가 스크린도어 오작동으로 사망했다. 김씨가 스크린도어와 출입문 사이에 낀 상태에서 이를 확인하지 못한 기관사가 열차를 출발해 사고가 일어난 것.
승객이 다치는 사고가 아니더라도 스크린도어 고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일이다. 김태수 서울시의회 의원의 조사에 따르면 2011~2016년 5년간 서울지하철 스크린도어 고장 사례는 총 1만9234건이다. 단순 계산으로도 하루 평균 10.5번 스크린도어 고장이 발생하는 셈.
권영국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처음 스크린도어를 설치할 때 제품의 기능보다 최저입찰제로 낮은 가격을 고집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진단했다. 권 교수는 “정부 차원의 스크린도어 안전기준을 세우고 최저입찰이 아닌 안전기준 통과를 원칙으로 서울지하철에 설치된 스크린도어를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서울시는 전수조사 결과 적격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101개 역의 스크린도어를 지난해 12월부터 정비하기 시작했다.
3월 8일에는 지하철안전대책도 발표했다. 이 대책에 따르면 새로 도입하는 열차에는 ATO(Automatic Train Operation) 장치가 탑재된다. 이 장치는 스크린도어가 열린 상태에서 전동차의 승강장 진출입을 막는 기능을 한다. 기존 열차에도 승강장 안전문(스크린도어)이 열린 상태에서는 출발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치를 달 예정이다. 이 밖에도 역마다 안전관리 인력을 2명씩 확충하고 비상 상황에 대처하고자 기관사 및 지원 인력 104명을 확보해 서울지하철 일부 구간에 1차량 2인 승무원 제도를 시범 운영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스크린도어 사고 대책의 첫 단추인 스크린도어 정비부터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서울시는 53개 역 스크린도어의 센서를 지난해 말까지 교체하겠다고 했으나 아직 공사 시작조차 못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우형찬 서울시의원에 따르면 서울메트로는 지난해 12월 9일 서울지하철 2호선 당산역 등 10개 역 스크린도어의 적외선 센서 761개를 레이저 센서로 교체하고자 9억4360만 원 규모의 물품 구매설치 공고를 냈다. ● 스크린도어 교체도 제자리걸음
적외선 센서는 먼지가 묻거나 습기가 차면 작동 이상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 데다, 센서가 고장 났을 때 승강장이 아닌 선로 쪽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보수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레이저 센서는 적외선 센서보다 가격은 비싸지만 잔고장이 적고 승강장에서 정비할 수 있어 유지 및 보수가 상대적으로 편리하다.
서울메트로는 적격심사를 통과한 업체 가운데 최저입찰액을 써낸 곳과 지난해 12월 29일 스크린도어용 레이저 센서 구매 및 설치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해당 업체는 당초 납품일인 2월 17일을 지키지 못했고, 4월 9일이 돼서야 센서를 납품했다. 납품이 50일가량 늦어진 이유는 새 센서가 한국철도표준규격(Korean Railway Standards) 시험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
서울메트로 관계자는 “업체와 계약을 해지할 만한 법적 근거가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센서 완성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밝혔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제 납품이 된 만큼 최대한 빨리 센서 교체에 착수해 당초 계획한 대로 2018년까지 서울 시내 모든 역사의 스크린도어 센서를 교체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한편 8월 말로 예정됐던 서울지하철 5호선 김포공항역 등 8개 역의 스크린도어 재시공도 공사를 맡겠다고 입찰한 업체가 없어 난항에 빠졌다. 서울시 관계자는 “서울시에서 발주한 금액을 조달청이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사례를 들며 깎았다. 삭감 폭이 커 응찰 업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조만간 조달청과 협의해 재입찰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 서울지하철 운영사 통합, 안전은 뒷전?
서울지하철 운영사가 하나로 합쳐진다. 3월 29일 시보에 서울메트로와 서울도시철도공사의 합병이 공고된 것. 서울시는 2014년 12월부터 지하철 안전 문제의 해결책으로 서울지하철 1~4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메트로와 5~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도시철도공사의 통합을 제시해왔다. 양대 공사로 나뉘어 생기는 중복 업무 인력을 안전 분야로 재배치해 안전관리를 강화하겠다는 것. 그러나 일각에서는 지하철 안전관리와 통합은 전혀 관련 없는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울시 발표에 따르면 이는 서울지하철 양대 공사를 통합하는 것으로, 연간 214억 원의 재무 효과가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향후 10년간 통합으로 발생하는 비용이 연간 426억 원이지만 비용 절감 효과는 연간 640억 원에 이른다는 예측이다. 서울시는 비용 절감의 핵심인 유사·중복 인력 1029명 감축으로 발생하는 절감액 607억 원의 45%를 안전관리 분야에 투입하고, 나머지 55%는 직원 처우 개선에 사용할 예정이다.
하지만 두 공사가 통합되면서 생기는 거대 노조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국토교통부는 지하철 통합 관련 서울시의 사전 협의 요청에 대한 회신에서 ‘거대 노조 형성에 따른 의견 불일치로 경영 혁신 곤란, 시민 불편 초래 등 부작용에 대한 사안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게다가 절감액의 과반이 안전관리가 아닌 직원 처우 개선에 쓰이는 것도 논란거리다. 2월 서울시의회 교통위원회가 개최한 ‘서울교통공사 설립 및 운영에 관한 조례안’ 공청회에서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양 공사 노조가 임금, 승진, 근무 조건 개선 등을 위해 통합 최종 협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것 같다. 사익 추구를 위한 도구로 공사 통합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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