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공공기관장 교체 태풍 부나… 123곳중 79곳 임기 1년이상 남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12일 03시 00분


[문재인 시대/공공기관 인사]새정부 출범뒤 숨죽인 공공기관

지방에 본사를 둔 한 공기업 직원들은 지난달부터 주말을 반납해 가며 공공기관 경영평가를 준비하고 있다. 조기 대선으로 들어서는 새 정부가 6월 발표할 공공기관 경영평가 결과를 토대로 공공기관장들의 거취를 정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실사 준비를 철저히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 직원은 “새 정권에 연줄이 없다고 알려진 사장이 애꿎은 직원들만 들볶는다는 불평이 적잖다”고 귀띔했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박근혜 정부 시절 임명된 공공기관장들의 거취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공공기관장 가운데 절반 이상은 임기가 1년 이상 남은 상황이다 보니 새 정부와의 동거가 어색해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 등으로 낙하산 인사와 공기업 독립성 훼손에 대한 반감이 커진 만큼 새 정부가 사장들에게 ‘일괄 사표’를 요구하기 쉽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이에 따라 6월 공공기관 경영평가가 기관장의 운명을 가를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 3명 중 2명은 임기 1년 이상 남아

동아일보가 11일 시장·준시장형 공기업과 기금관리형·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 123곳의 기관장 잔여 임기를 조사한 결과 79곳은 1년 이상 남아 있었다. 3명 중 2명은 임기를 2년도 채우지 못한 채 새 정부 출범과 함께 거취 고민을 하게 된 셈이다.

준정부기관을 제외한 공기업들 중에서는 여수광양항만공사 사장의 임기가 2020년 3월까지로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올해 초 취임한 인천항만공사와 한전KPS 사장 등의 임기도 각각 2020년 2월, 1월까지다. 임직원 5000명 이상의 대형 공기업 중에서는 한국수자원공사와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사장 임기가 각각 2019년 9월과 5월까지다.

관련 기관에 따르면 지난해 취임한 기관장들은 대부분 자신의 ‘실질적인 임기’를 내년 이후로 생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박근혜 정부의 임기가 내년 2월까지 지속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이전 정부에서 임명된 기관장들이 사임하던 그동안의 관행에 따라 대선 직후나 새 대통령 취임 직후 물러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실제로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 취임 당시 한국가스공사 등 주요 공기업 사장들이 임기를 채우지 않은 채 사표를 냈다. 이명박 정부 때에는 코레일 사장 등 대형 공기업 사장들이 인수위 기간에 사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10일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11일 박명진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과 김세훈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등이 정부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또 일부 정치권 출신 사장 등은 일찌감치 사임 준비에 나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관장 임기가 올해 말까지인 한 공기업의 임원은 “박 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지난해 말부터 사장이 정계 복귀를 타진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대통령이 ‘원칙 따른 公기관 인사’ 천명해야”

이런 분위기에도 당분간 대다수 기관장들이 사임하지 않고 직책을 계속 수행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과거처럼 새 정부가 기존 사장들에게 일괄 사표를 요구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최순실 게이트 등으로 낙하산 인사와 공기업 독립성 훼손에 대한 반감이 높아진 상황에서 지난 정부 인사라는 이유로 한꺼번에 사표를 받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일부 기관장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사퇴 압력으로 퇴진하면 공공기관장 임기제가 ‘허울뿐인 원칙’에 그칠 뿐이라며 임기를 채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재부 관계자는 “공공기관장의 임기가 법적으로 보장돼 정부가 사임을 강요할 수 없다”며 “내부 출신 등 전문성을 갖췄다고 평가되는 인사들을 새 정부가 물갈이하면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속앓이를 하는 것은 캠프 출신 등 정치권 인사들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정권과 코드가 맞지 않는 인사가 수장 자리를 지킬 경우 새 정부 정책 추진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어서다. 게다가 ‘자리’를 요구하는 정치권의 수요를 외면하기도 어렵다.

이 때문에 다음 달 발표될 공공기관 경영평가 결과가 공공기관장들의 운명을 가를 결정적인 지표로 쓰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관장 해임 건의 대상인 E등급 기관뿐 아니라 C, D등급의 기관장이 대거 사임 압박을 받을 수 있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인사 혼란기일수록 새 정부가 ‘원칙에 따른 인사’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치권 인사들이 개국공신을 자처하고 기관장 자리를 원할 경우 낙하산 논란 등으로 혼란이 가중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원구환 한남대 행정학과 교수는 “새 정부가 임기 초기에 공공기관장 인선에 대한 원칙을 천명하면 기존 기관장들의 눈치 보기와 측근들의 자리싸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천호성 기자 thousa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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