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 마지막 날이었던 2015년 10월 26일. 정정향 씨(56·여)는 사람 눈빛에 그렇게 오만 감정이 다 담기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43년 전 서해에서 홍어를 잡다가 납북된 오대양62호 선원 오빠 정건목 씨(66)의 퀭한 눈이 허공을 향했고, 정향 씨와 아흔의 노모는 하릴없이 손바닥이 닳도록 버스 창문에 비친 정 씨를 쓰다듬었다.
해후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해 초. 북녘에서 오빠가 보냈다는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동아일보가 8일 입수한 편지에는 “어머니와 정매누이 정애동생을 만난 후 눈을 뜨고 감아도 온통 어머니와 형제들 생각뿐이다. 모두들 너무 보고 싶고 만나고 싶다”며 여전히 건강하고 살아있으니 소식을 기다린다는 정 씨의 애끓는 심정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정향 씨 등 남쪽의 가족들이 보기에는 북한의 오빠가 보냈다고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내용들이 편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오빠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이렇게 쓸 수 없어요. 필체도 다르고요. 이 편지는 무조건 가짜, 100% 가짜입니다.” 정향 씨가 목소리를 높였다.
건목 씨가 큰형인 건국 씨를 가리켜 “‘건국동생’은 어떻게 하면 죽기 전에 만날 수 있을까요?”라고 썼다는 것. 이산가족 상봉 때 건넸던 4000달러에 대한 용처도 편지에선 “2000딸라(달러)는 정부에 부치고, 2000딸라는 함께 사는 딸 집을 사서 세간을 내보냈다(결혼시켰다)”고 했으나 가족들은 “상봉 당시 아들, 딸들이 이미 출가해 김장철마다 본가를 찾는다고 했다”고 바로잡았다. 가족들은 이 편지가 국가보위성으로 추정되는 북한 당국이 어설프게 꾸며 보낸 편지라고 의심하고 있다.
“때로는 ‘안 만나느니만 못한 만남’ 같습니다.” 1년 8개월 전 662.9 대 1의 경쟁을 뚫고 혈육을 만난 마지막 이산가족 상봉자들이 말했다. 만나서는 할 말을 속 시원히 못 해서, 만난 직후엔 사무치는 그리움을 견디기 힘들어서, 그 후엔 슬픔과 절박함을 미끼로 가족들을 두 번 울리는 사람들 때문이란다. 8월 15일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 중인 문재인 정부와 ‘해외 종업원들을 먼저 송환하라’며 선결 조건을 내건 북한 간의 줄다리기 속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 생존자 6만746명(5월 현재 통일부 집계)의 달력이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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