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정훈]김정은의 ‘통일 대박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3일 03시 00분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를 고민할까. 지난주 백악관에서 쫓겨난 ‘트럼프 정권의 설계자’ 스티브 배넌이 ‘핵 동결과 주한미군 철수를 맞바꿀 수 있다’는 취지의 인터뷰를 한 다음 날 트럼프 행정부의 한 관리와 만났다. 그는 “트럼프의 속마음까지는 모르지만 백악관과 국무부 국방부 공식 라인에서 주한미군 철수 카드를 고려하는 징후는 전혀 없다”고 했다. ‘북한이 핵 동결을 전제로 미군 철수를 요구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그때 가서 생각해 볼 문제”라고 했다. 전략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협상 가능한 일로 만들 수 없다는 논리였다. 얼핏 그럴듯했다. 주한미군 철수는 그들과 달리 우리에겐 존망이 걸린 문제다. “고려한 적 없다”는 미국의 말만 믿을 순 없다.

트럼프 정부는 북한과의 대화 조건을 ‘핵 폐기’에서 ‘핵 동결’로 조정했다. 문턱을 낮춰야 북한을 테이블에 앉힐 수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이다. 31일 을지프리덤가디언(UFG)이 끝나면 9월엔 대화 국면이 열릴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기저엔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전략이 맞물려 있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경합주(swing state)에서 지지율이 34∼36%까지 떨어진 트럼프는 북핵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폐기든 동결이든 성과가 필요하다. 로드맵을 그려보면 하루빨리 만나야 임기 내에 답이 나온다.


하지만 김정은은 애를 태우게 하고 있다. 조셉 윤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박성일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의 비밀 협상채널도 이달 들어 끊긴 상태라고 한다.

대화를 해도 주도권은 김정은이 쥔다. 트럼프가 “요구 사항이 뭐냐”고 물으면 북한은 숨도 안 쉬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라고 할 것이다. ‘자주적 통일’은 김정일이 2001년 평양에 세운 조국통일3대헌장 기념탑에 새겨진 통일 원칙 중 하나다. 재작년 미군 주둔 70년을 맞아 발표한 북 외무성 담화에서는 “우리 민족끼리 평화를 수호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 조건에서 ‘조선반도의 안정을 보장한다’는 미군 주둔 구실은 통하지 않게 됐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의 원칙이 ‘평화 통일’이다. 평화의 본질은 ‘힘의 우위’에 있다. 실력이 비슷한 건달패가 세력을 다투다가 갑자기 “우리끼리 이러지 말자”며 구역을 나눠 먹을 순 없다. 진짜 평화는 강자가 약자를 제압한 뒤에야 찾아온다. 북한식 평화를 ‘핵을 기반으로 한 적화(赤化)’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동결이든 폐기든 핵을 대화로 막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64년간 핵에 매달린 김씨 일가가 완성을 코앞에 두고 포기할 리 없다. 최고의 핵전략 분석가로 꼽히는 폴 브래컨 예일대 교수는 “북한은 남한과 일본을 핵 인질로 잡고 ‘이웃의 거실에서 자살하기(suicide in your neighbor’s living room)’ 전략을 쓰고 있다”고 했다. 내가 죽어도 피는 너희 집에 튄다는 식이니 어쩌기 힘들다는 것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정도의 막대한 자금이나 피를 쏟아붓지 않는 한 미국은 2차 핵시대를 막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핵 동결은 시간만 벌 뿐 핵 폐기를 담보하지도 못한다. 북한의 요구가 쏟아지면 우린 또 “해주자, 말자” 하며 엄청난 남남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통일은 북한 김정은에게도 대박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통일 대통령을 꿈꿨지만, 김정은은 통일 왕국을 그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착각을 하고 산다. 김정은이 저 살려고 핵에 매달리는 거라고, 핵은 미국을 겨냥한 것이지 우리와는 상관없다고, 대화로 평화롭게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착각이 우리를 조금씩 집어삼키고 있다. 김정은은 지금 ‘적화통일’이라는 혁명 과업 완성의 8분 능선을 넘고 있다. 김정은이 통일 대박을 치는 날, 바로 그날 우리의 지옥문이 열린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sunshad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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