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만난 석해균 선장(65)은 왼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다리를 절뚝이며 걸었다. 밖으로 삐져나온 오른팔 와이셔츠 소매는 단추가 풀려 있었다. 총상 후유증이 남은 왼손으로는 오른쪽 소매를 제대로 여미지 못했다. 2011년 소말리아 해적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아덴만의 영웅’은 6년 넘게 후유증과 전투 중이었다. 다행히 이기고 있었다. 총알이 왼 손목을 관통해 신경이 마비됐지만 끈질긴 재활훈련으로 주먹을 쥘 수 있게 됐다.
“총 맞았을 때 너덜너덜해져서 ‘못 쓰겠구나’ 했어요. 그걸 이국종 교수가 살려놓은 거라고.”
○ 이 교수 영상 공개 요청에 “그래, 그리 해라”
2011년 수술 받고 의식을 회복한 지 사나흘 뒤 석 선장은 이 교수가 자신을 살렸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엔 그 양반 표정도 무뚝뚝하고 별 감흥이 없었어요. 근데 몸속 철심 빼내고 사소한 거 하나하나 할 때마다 진심이 느껴지더라고. 가랑비에 젖듯 신뢰가 생겼지요.”
퇴원 후 석 선장과 이 교수는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됐다. 이 교수의 왼쪽 눈이 실명 직전이고 고혈압 약을 먹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나는 이 교수 볼 때마다 ‘몸 좀 그만 혹사시키라’고 해요. 그럼 이 교수는 ‘일이 밀려서 안 된다’고 하고. 안쓰럽지.”
석 선장은 89세 노모를 돌보고 있다. 모친의 건강이 안 좋으면 자정에도 연락해 조언을 얻는 사람이 이 교수다. 석 선장이 증상을 설명하면 이 교수가 필요한 약품을 일러준다. 이 교수의 긴급 처방 덕분에 석 선장 어머니는 여러 번 기력을 되찾았다. 석 선장은 “알뜰살뜰 사람을 챙기는 의사”라고 했다.
그런 이 교수에게서 21일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북한 귀순 병사를 살려낸 뒤 휘말린 ‘인권 테러’ 논란에 대해 이 교수가 작심하고 반박한 언론 브리핑 하루 전이었다. “선장님 수술 영상을 공개해도 되겠느냐”는 이 교수의 조심스러운 요청에 석 선장은 망설이지 않았다.
“단 1초도 고민 안 했어요. ‘그래, 그리 해라’ 이렇게만 말했어. 이 교수에게 ‘쇼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나요. 죽다 살아온 내가 증인인데.”
석 선장은 이 교수가 귀순 병사의 인권을 무시했다는 일각의 비난을 의식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외상 의사가 지킬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인권은 환자 목숨을 살리는 것 아닙니까. 병원에서 살아난 환자들이 인권 운운하며 이 교수를 비난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석 선장은 권역외상센터를 확대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참여했다. “여러 ‘이국종(의료 인력)’, 여러 ‘석해균(생존 환자)’이 계속 나와야 해요. 외상센터 수혜자가 대부분 우리 산업의 밑바닥을 지탱하면서도 병원비 감당이 힘든 블루칼라 근로자들입니다.”
○ “귀순병 그 친구, 나하고 같아요”
‘석해균 선장님, 이곳은 대한민국입니다.’
6년 전 석 선장이 아주대병원 병실에서 깨어났을 때 눈앞에 플래카드와 태극기가 희미하게 보였다. 귀순 병사 오모 씨(25)가 20일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되찾았을 때도 정면에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내가 살아있다는 걸 처음 깨닫던 순간의 경이로움. 귀순병 친구도 똑같이 느꼈을 겁니다.”
이 교수팀의 수술 후 13일 만에 깨어난 석 선장은 2011년 3월 병상에서 생일을 맞았다. 그는 의료진이 준비한 축하 케이크에 초를 하나만 꽂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에겐 다시 태어난 날, 한 살로 되돌아간 날이었다. 환갑이 넘은 그가 “올해 일곱 살”이라고 한 이유다.
“귀순병 그 친구, 나하고 같다고 생각해요. 이제 한 살로 다시 살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지난 25년간 얼마나 고생했겠어.”
생사의 갈림길을 먼저 지나온 선배로서 석 선장은 귀순 병사에게 조언했다.
“큰 고비는 넘겼지만 이제 부정적인 감정이 밀려올 거예요. 건강할 땐 상상도 못 했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올 겁니다. 그럴수록 긍정적으로 마음먹어야 회복도 빨라져요.”
석 선장도 의식을 회복한 뒤 움직이지 않는 왼손, 여기저기 꿰맨 몸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고 한다. 이후 넉 달간 죽고 싶다는 생각에 시달리다 얻은 깨달음이었다.
○ ‘항상 전쟁터에 있다’
배의 키를 내려놓은 석 선장은 2012년부터 6년째 경남 창원시 해군교육사령부에서 안보교육관으로 일하고 있다. 군인 경찰 소방관 등 공무원과 일반인을 교육하며 자신의 경험담을 나눈다. 얼마 전 교육생이던 소방관이 그에게 “선생님 덕에 살았다”며 인사를 하러 왔다. 화재 현장에서 불길에 갇혀 버린 순간 석 선장을 떠올리며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을 고비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다.
“이 교수가 살린 건 단지 저 하나뿐이 아닙니다. 아직 살아있는 저를 보면서 절망을 이겨낸 사람들까지 살려낸 겁니다.”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진 않았다. 총탄이 관통해 피부가 괴사한 오른쪽 등에는 하루 5, 6차례 원인 모를 통증이 찾아온다.
“아플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끙’ 하고 신음을 내며 견디는 거예요. 교회에 가면 ‘고통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해요.”
지난해 10월 근무 도중 갑자기 장폐색이 왔다. 장으로 가는 피가 안 통해 심할 경우 장 조직이 괴사하는 병이다. 응급조치가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 석 선장은 헬기에 태워져 아주대병원으로 이송됐다. 워낙 복잡한 수술을 받았던 터라 석 선장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는 이 교수밖에 없었다. 약물 처방을 받은 석 선장은 8일 만에 회복됐다.
석 선장의 해군사령부 사무실 벽에는 ‘恒在戰場(항재전장)’이라고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항상 전쟁터에 있다’는 뜻. 그가 액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상에서 회복하는 과정도 일종의 전쟁이죠. 지금껏 잘해 왔으니 앞으로도 포기 안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석 선장은 자신의 차에 올라타 핸들을 잡았다. 주먹을 쥐는 데 5년 걸린 왼손도 핸들에 얹었다. “조금만 더 하면 왼손으로 소매 단추를 끼워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지가 눈앞이오.” 그는 마음도 한결 여유로워졌다고 했다. “예전에는 다른 차가 끼어들면 쫓아가서 삿대질을 해야 직성이 풀릴 정도였어요. 지금은 ‘나보다 더 바쁘구나’ 하면서 비켜준다고. 하하.” 석 선장이 ‘전투’에서 이기고 있는 방법은 긍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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