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탄압 받는 東亞 지키자” 홍준표, 친구들과 성금모아 전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3일 03시 00분


[나와 동아일보]<2>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대학 졸업 당시의 洪대표 1977년 고려대 졸업식 때 학사모를 쓴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 그는 1972년 입학식 날 동아일보에 가정교사 광고를 낸 뒤 생활비를 벌면서 대학을 다녔다. 홍준표 대표 제공
대학 졸업 당시의 洪대표 1977년 고려대 졸업식 때 학사모를 쓴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 그는 1972년 입학식 날 동아일보에 가정교사 광고를 낸 뒤 생활비를 벌면서 대학을 다녔다. 홍준표 대표 제공
1974년 12월 말 겨울, 고려대 중앙도서관 열람실에 대자보를 내걸었다. 큰 전지에 매직으로 내가 직접 썼다.

‘우리의 현실을 가장 정직하고 불편부당하게 보도해오던 민족의 양심 동아일보가 대광고주들의 무더기 광고 해약으로 창간 이래 가장 극심한 경영난에 봉착하고 있으니 우리의 작은 성의를 보내자.’

나를 포함한 고려대 법대생 5명이 책상 위에 올라가서 학생들을 향해 고함을 쳤다. “동아일보가 광고탄압을 받고 있다. 민족의 양심 동아일보를 지키자.” 모자를 하나 들고 도서관을 돌았다. “돈을 좀 내달라. 버스표라도 좋다. 유신 정권을 타도하자. 그렇게 하려면 동아일보를 도와줘야 한다.”


오전 10시 반부터 2시간 동안 네 군데 도서관을 돌았는데, 학생 400여 명이 동전과 지폐를 십시일반으로 보탰다. 순식간에 2만1200원이 모였다. 내 기억에는 그때 한 달 하숙비가 1만2000원이었으니, 하숙비보다 많은 돈을 모은 것이다.

친구들과 동아일보 광화문사옥을 찾았다. ‘기관원 출입금지’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래층에서는 기자들이 농성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바로 위층 편집국장실로 갔다. 한복을 입고 있던 동아일보 송건호 편집국장에게 성금과 대자보를 전달했다. “자유언론을 수호하느라 고생하신다”고 했고,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고 했다.

얼마 뒤 하숙집에 배달 온 동아일보 사회면에는 ‘익명의 고대생들 동아일보 격려 성금’이라는 기사와 대자보 내용이 실렸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고려대에 다닐 때 같이 하숙을 하던 법대 친구 4명과 함께 광고 탄압을 받던 동아일보에 성금을 모아 전달했다. 동아일보는 고려대 도서관 열람생들이 성금과 격려의 글을 익명으로 전달한 사실을 1975년 1월 4일자 사회면(7면)에 상세히 보도했다.

“고려대학생 5명은 중앙도서관 등 네 군데 도서관에서 400여 명으로부터 받은 동아일보를 위한 성금 2만1200원을 본사에 전달했다. 이들은 ‘동아일보에 작은 성의를 보내자’는 벽보를 붙이고, 2시간 동안 각자가 20원에서 500원을 낸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학교 앞에서 고려대 재학생 8명과 함께 하숙을 했다. (당시 1부당 한 달 구독료가 600원이었던) 동아일보를 그때 하숙집은 학생 1명당 1부씩 8부를 구독했다.

성금 아이디어는 하숙집에서 처음 논의했다. 프랑스 르몽드지의 경우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자유롭게 쓰기 위해 광고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광고 없이 신문사를 경영할 수 있게 르몽드를 벤치마킹하자. 동아일보 집단 구독운동이 시작됐지만 광고가 끊겼으니 어려울 것 아니냐, 성금을 모아보자”고 했다. 성금을 낸 것은 우리가 맨 처음이라고 들었다. 그 보도가 나간 뒤 독자들의 격려광고가 줄줄이 이어졌다. 백지광고의 불을 댕겨준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 중앙정보부 학원종교국(6국)에서 연락이 왔다. 대자보의 글씨체로 내가 성금을 낸 것으로 지목됐다. 그해 10월에 3, 4차례 유신 반대 시국 사건 유인물을 내가 여관방에서 가리방(등사기)으로 긁어서 써 준 게 빌미가 됐다. 중정 요원이 동일 필체를 추적해 나를 찾아낸 것이다. “북한 관련성이 있는 것 아니냐” “집이 찢어지게 가난한데, 사회주의 사상이 있는 것 아니냐” 등 8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같이 간 동료들에 대해 끝까지 함구했는데, 각서를 쓴 다음에 풀려났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3차 면접 때 동아일보 성금과 유인물을 쓴 전력이 문제가 됐다. 그러나 “밖에 두면 반체제 인사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최종 합격하면서 변호사 자격증이라도 갖게 됐다.

사실 내가 동아일보를 찾은 건 성금 전달이 처음은 아니었다. 1972년 3월 동료들이 입학식에 들떠 있던 그날 나는 동아일보로 갔다. 두 줄에 800원 하는 가정교사 광고를 내기 위해 동아일보 광고국을 찾았다. 1만4000원을 들고 상경해 하숙비(1만2000원)에 광고비까지 내고 1200원만 남은 그날 동료 하숙생에게 가난한 신세를 한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고난과 혼돈의 대학 시절을 함께한 동아일보가 3만 번째 신문 발행을 앞두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는 절대적이었다. 1등 신문이었다. 동아일보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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