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서 가능한 사업 한국선 못해… 자승자박 과잉규제 때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9일 03시 00분


재계 수장 신년사 ‘규제혁파 호소’

“‘법을 고치지 않고도 가능한 규제 완화라도 해보자’는 경제부총리의 말씀이 절규로 느껴지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된다.”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이 신년사에 직접 쓴 이 문장은 현재 재계가 느끼는 ‘규제 완화의 필요성’이 얼마나 절실한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이후부터 줄곧 최우선 국정과제로 ‘일자리 창출’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하는 기업들은 규제에 가로막힌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박 회장은 “일자리는 모름지기 기업이 투자를 할 때 생긴다. 허용된 사업들은 대부분 공급과잉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에 …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사업에서 투자를 일으켜야 고용창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규제 혁파 없이는 일자리 창출도 없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소득 주도 성장, 혁신 성장도 좋지만 투자를 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다 가능하게 하는 ‘무차별 투자성장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는 특히 “4차 산업혁명 전선에서 중국에 뒤지고 있다”고 진단하고 “적어도 중국에서 가능한 것은 무엇이든 한국에서도 가능하게 하겠다는 수준의 규제 혁파를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실제로 한국벤처창업학회 등이 7월 주최한 정책발표회에선 중국 핀테크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알리바바 자회사 안트파이낸셜의 클라우드를 기반으로 한 금융 플랫폼 사업 등은 국내에서 사업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금융회사의 정보처리 업무 위탁에 관한 규정상 클라우드에 금융 정보를 올리는 행위가 위법이기 때문이다. 미국, 유럽 등 상당수 국가에서 보편적 서비스로 자리 잡은 차량 공유 서비스 ‘우버’도 한국 진출을 시도했다가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위반으로 사업을 접었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도 신년사에서 “후발주자였던 중국이 턱 밑까지 추격해 왔다”며 위기감을 드러냈다. 그는 정보통신기술(ICT) 발달로 산업 간 경계가 무너지고 융·복합 혁신이 잇따르는 현재 상황을 ‘가보지 못한 길 위에 서 있는 꼴’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자가 도덕경에 쓴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공을 세웠으면 그 자리에 머물지 말라)’를 인용하며 “우리 경제가 과거에 일궈놓은 질서에 머물지 말고 새로운 도전과제를 극복하고 미래 성장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박 회장의 지적대로 국내 경제가 성장기업을 배출하는 역량은 크게 떨어진 상태다. 현재 비상장이면서 기업 가치가 10억 달러(약 1조1350억 원)가 넘는 ‘유니콘’ 기업 중 상당수는 중국 기업이다. 미국 벤처캐피털 시장조사기관 CB인사이츠에 따르면 9월까지 유니콘 기업 215개 중 중국은 24개를 차지해 미국(51개)에 이어 2위다. 한국은 쿠팡과 옐로모바일 2개 기업에 불과하다.

경제단체들은 내년 경제계가 많은 변화와 도전에 직면할 것이라는 점을 들며 이에 대비하기 위해 규제 시스템의 변화를 주문했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우리 경제의 혁신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미국 유럽 등 주요 선진국의 통화긴축 기조 때문에 불확실성이 우려되고 내수시장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에 “생산가능 인구의 본격적인 감소, 유가 금리 원화가 모두 강세를 보이는 ‘신(新) 3고(高)’가 복병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허 회장은 “변화는 위기일 수도 있지만 기회이기도 하다”며 현 상황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역설했다.

김영주 한국무역협회장은 “‘초불확실성 시대(The Age of Hyper-Uncertainty)’라고 불릴 만큼 최근 세계 경제의 변동성과 위험이 커지고 있다”며 “성장잠재력이 높은 서비스산업 수출경쟁력을 높이고 전기차, 로봇, 바이오헬스 등 신산업 수출을 확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성택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은 신년사에서 “중소기업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할 수 있도록 산업은행·수출입은행의 중소기업 전담 은행화, 투자 중심 금융시장 조성, 현장 중심형 규제개혁 과제를 마련하겠다”고 강조했다. 또 “대기업 기술 탈취를 근절시키고 공정원가제 도입 같은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한편 생계형 적합 업종 등을 위해 정부 국회와 긴밀하게 소통하겠다”고 덧붙였다.

서동일 dong@donga.com·이은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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