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웬일입니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일 그리다이언(Gridiron) 기자클럽 만찬에 등장했습니다. 취임 후 기자들과 사사건건 부딪치면서 주류 언론 기사를 ‘가짜뉴스’라고 몰아대기 바빴던 트럼프 대통령이 드디어 화해의 첫걸음을 뗀 걸까요.
그리다이언 기자클럽이 뭐냐고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CNN 등 유력 언론매체 30∼40곳 기자들의 친목단체입니다. 대통령을 초청해 연례만찬을 개최할 정도로 미국 언론계에서 위상이 높은 곳이지요.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올해는 아내, 딸, 사위까지 거느리고 나타났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드디어 연단에 섰습니다. 참석한 기자들 중에는 ‘독설의 대가인 트럼프 대통령이 여기서도 독설 퍼레이드를 펼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I‘m here to singe, not to burn.”
트럼프 대통령이 이렇게 운을 뗍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기자들을 안심시키는 겁니다.
‘(불이나 태양에) 태우다’ ‘타다’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는 여러 개가 있습니다. ‘Burn’ ‘scorch’ ‘singe’ ‘char’ ‘tan’ 등등 많죠. 타는(태우는) 강도로 볼 때 ‘burn’과 ‘singe’는 정반대에 있습니다. ‘Burn’은 활활 태우는 것이고 ‘singe’(‘신지’라고 발음)는 살짝 태우는 것, 즉 그슬리는 것입니다.
“나는 활활 태우러 온 것이 아니라 그슬리려고 온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나 이슈에 대해 맹렬하게 비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한 셈입니다. 기자들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흘렀습니다. “살짝 태우러 왔다”는 얘기는 독설을 퍼붓지 않는 대신, 뼈있는 농담을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언론 천적 1호라고 할 수 있는 뉴욕타임스를 화제에 올렸습니다. “I’m a New York icon. You‘re a New York icon. The only difference is, I still own my buildings (나도 뉴욕을 대표하는 아이콘이고 당신(뉴욕타임스)도 그렇다. 유일한 차이는 나는 아직 빌딩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정난에 시달리는 뉴욕타임스가 본사 건물을 매각한 것을 비꼰 겁니다. 자신의 기업가적 능력에 대한 자랑까지 섞어가면서 말이죠. 뉴욕타임스는 이 말을 들었을 때 더 기분이 나빴을 겁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뉴욕타임스 기사는 가짜뉴스”라고 했을 때보다 말이죠. 상대를 대놓고 비난하지 않는 대신,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 허를 찌르는 농담을 하는 것이 트럼프를 비롯한 미국 정치인들의 대화법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핏대를 올리고 고성과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종종 국회의사당을 박차고 나가 장외투쟁을 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미국 정치인들은 뼈 있는 농담으로 치고받으며 협상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 정치판 자체가 바로 ‘singe, not burn’인 셈입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