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알처럼 생긴 투명하고 작은 렌즈를 자세히 보기 위해 눈에 가져다 댔다.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던 작고 반짝이는 점 몇 개가 렌즈 한가운데에 있었다. 점의 정체는 아주 작은 ‘핀홀’. ‘이걸로 어떻게 화면을 본다는 거지?’ 싶었지만 안경을 쓰듯 렌즈를 눈 바로 앞에 가져다 대고 점을 응시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핀홀 너머로 시야를 가득 채우는 화면이 나타난 것. 건강검진 때 주로 보는 시력 측정표부터 우주 공간을 떠도는 듯한 영상, 화려한 색의 의상을 입은 걸그룹의 뮤직비디오까지 최신 TV로 보는 것처럼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이 렌즈는 증강현실(AR)용 광학렌즈 개발 스타트업인 ‘레티널(LetinAR)’의 제품이다. 시력이 나쁜 사람도 비스킷 한가운데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사물을 보면 안경을 낀 것처럼 선명하게 볼 수 있는 핀홀 원리를 활용한 스마트글라스를 개발하고 있다.
기자는 최근 서울 강남역 근처에 있는 네이버의 기술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인 ‘D2스타트업팩토리(D2SF)’가 제공한 업무공간에서 김재혁 대표를 비롯해 6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는 레티널 사무실을 찾았다.
이 회사는 2016년 10월 설립된 신생 기업이다. 창업한 지 고작 1년 반 정도 지났을 뿐이지만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내놓은 기존 스마트글라스와 전혀 다른 접근법을 써서 AR에 관심 있는 글로벌 업체들로부터 협업 제안을 잇달아 받고 있다.
눈앞을 완전히 막은 뒤 영상을 보여주는 가상현실(VR)보다 실제 주변을 볼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원하는 화면을 보이게 하는 AR는 영상을 구현하기 좀 더 까다롭다. 글로벌 업체들은 반투명거울이나 홀로그래픽 광학 소자 등을 활용했지만 레티널은 핀홀 원리를 활용한 ‘핀미러 렌즈’라는 전혀 다른 개념을 활용해 이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레티널 렌즈는 보통 55도 정도의 시야각을 가진 기존 스마트렌즈와 달리 시야각을 약 71도까지로 넓혔다. 화면이 약 66% 더 커지는 셈이다. 또 기존 제품들은 눈앞 1.25m 이상 거리의 사물부터 또렷하게 구현할 수 있었지만 레티널 제품은 초점거리가 짧아 눈앞 25cm 앞 사물도 보이게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재 AR의 최대 문제점으로 꼽히는 멀미 현상을 크게 해소할 수 있다. 색이 번지는 현상 없이 색상 표현도 훨씬 정확한 데다 유리 외에 플라스틱으로도 제품을 만들 수 있어 훨씬 가벼운 스마트글라스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일반인에게는 생소하지만 광학 분야 전공자들이 레티널의 아이디어를 들으면 ‘아, 왜 이 생각을 진작 못했지’ 하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전공자라면 생각은 해볼 법해도 실현을 못 한 아이디어인 셈이다. 하지만 학부 재학 시절 창업에 뛰어든 김 대표와 하정훈 기술이사(CTO)는 처음에는 시제품을 만들 공장도 구하지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하기가 일쑤였다.
이런 상황을 바꾼 것은 창업 8개월 만에 이뤄진 D2SF의 투자. 김 대표는 “‘네이버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주변 시선이 달라지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네이버로부터 5억 원 등 총 8억 원의 투자를 유치해 대부분 시제품 제작과 기술 개발에 쓰고 있다.
이 회사 직원인 노지원 매니저는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박람회로 꼽히는 국제가전전시회(CES)와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에 참여하면서 처음에는 막막했다”며 “D2SF에 같이 입주한 다른 기업의 노하우를 공유해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었고, 이제는 다른 기업들에도 노하우를 전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CES와 MWC 참가는 레티널이 유명 글로벌 업체들을 접촉해 협업을 진행하는 계기가 됐다.
김 대표는 “처음에 기술을 인정해 주지 않던 분들이 ‘이게 정말 실현될지 몰랐다’며 격려해 주고 있다”며 “아이디어에 대한 검증은 끝났지만 기술 상용화는 다른 문제인 만큼 더 집중해 상용화 문턱을 넘고 싶다”고 의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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