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연출가 박근형(55). 그는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검열과 ‘블랙리스트’ 사태의 발단이 된 인물이다. 2013년 국립극단에서 올린 연극 ‘개구리’ 때문이었다. 고대 그리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이 작품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미화한 반면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그는 지난 정권에서 각종 정부지원에서 배제됐고, 국립극단에서 작품 활동도 할 수 없었다.
이와 관련 국립극단은 14일 홈페이지에 올린 공식 사과문에서 “연극 ‘개구리’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도화선이 됐다. 이후 여러 작품에 걸쳐 부당한 지시, 외압, 검열이 지속됐고, 국립극단은 이를 실행하는 큰 과오를 저질렀다”고 인정했다.
그가 5년 만에 국립극단에 복귀한다. 18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르는 연극 ‘페스트’를 통해서다. 서울 용산구 청파로 국립극단에서 10일 박 연출가를 만났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하지만, 오랜만에 국립극단과의 작업을 앞둔 그의 표정에서는 설렘이 묻어났다. 하지만 소감을 묻자 그는 “덤덤하다”고 했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르고, 정부 지원 사업이나 국립극단과의 작업에서 배제됐다고 해서 상처를 입거나 억울한 건 없었어요. 저와 같이 작업했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받은 동료 연극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을 뿐입니다.”
그가 선택한 작품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원작은 알제리의 도시 오랑에 급작스럽게 닥친 페스트의 확산과 이를 이겨낸 시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연극에서는 시대와 배경을 동시대 한국으로 옮겨왔다.
“현대사회만큼 하루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불확실한 사회가 있을까요? 그런 사회에서 전염병이 번지고, 도시가 폐쇄되면 한국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죠.”
그는 원작의 도시 ‘오랑’을 철조망을 두고 둘로 나뉜 한반도로 변주했다. 작품에서는 장벽으로 인해 둘로 갈라진 섬을 배경으로 삼았다.
“미세먼지, 혼밥 등 요즘 한국 사회에서 화두가 되는 소재를 곳곳에 배치했어요. 관객이 한국인이니까 가장 와 닿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게으른 연출가’라고 평가한다. 그가 대표로 있는 극단 골목길의 대표작 ‘경숙이, 경숙 아버지’ 초연 당시 대본이 완성되지 않은 채 무대에 올라 공연 초반 관객들에게 “대본이 여기까지 나와 오늘 공연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겠다”고 공지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연습실에서 만난 그에게서는 열정이 느껴졌다. 같은 장면을 놓고 A안, B안을 따로 구성해 하나를 선택하거나 두 안을 혼합하는 등 다양한 실험과정을 거쳤다.
“연극에 대한 철학이 ‘놀면서 하자’예요. 연극은 무조건 쉽게 만들어야 해요. ‘페스트’가 워낙 방대하고 등장인물이 많은 작품이라 리유 캐릭터를 극중 의사와 내레이터 2개 역할로 나누는 등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각별히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6월 10일까지. 2만~5만 원.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