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기 힘들어”… 무단횡단 비극 부르는 ‘횡단보도 200m 룰’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11일 03시 00분


[생명운전 차보다 사람이 먼저다]<10>도심도로 횡단보도 간격 좁혀야

서울 강동구 둔촌동 진황도로에서 한 학생이 무단횡단을 하고 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택시 한 대가 달려오고 있다. 횡단보도가 아닌 곳에서 길을 건너는 건 도로교통법상 분명한 불법이다. 하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곳곳에서 무단횡단을 일삼고 그로 인한 사고도 반복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서울 강동구 둔촌동 진황도로에서 한 학생이 무단횡단을 하고 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택시 한 대가 달려오고 있다. 횡단보도가 아닌 곳에서 길을 건너는 건 도로교통법상 분명한 불법이다. 하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곳곳에서 무단횡단을 일삼고 그로 인한 사고도 반복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5일 오전 3시 40분경 부산 부산진구 지하철 서면역 인근 중앙대로에서 한 20대 여성이 서모 씨(24)가 몰던 차량에 치였다. 여성은 중상을 당했다. 사고가 난 곳은 왕복 7차로 도로의 한가운데였다. 제한최고속도는 시속 60km. 경찰은 20대 여성이 무단횡단을 하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주변에 횡단보도는 없었다. 가장 가까운 횡단보도는 사고 현장에서 남쪽으로 355m 떨어져 있다. 그 대신 지하상가가 조성된 지하보도가 있다. 부산의 중심을 통과하는 큰 도로이지만 횡단보도는 없다. 신호등 옆에 ‘무단횡단 사고 잦은 곳’이라는 표지판만 달려 있었다.

○ ‘무단횡단’의 유혹이 낳은 비극

10일 경찰청 등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무단횡단 사고 9590건이 발생했다. 562명이 목숨을 잃었다. 꾸준히 줄고 있지만 여전히 하루 1명 이상이 무단횡단을 하다가 숨진다. 무단횡단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은 물론 보행자의 안전 불감증이다. ‘신호를 기다리기 귀찮아서’ ‘돌아가기 힘들어서’ 같은 이유 때문이다. 2, 3개 차로만 건너면 되는 중앙버스전용차로 정류장 부근에서 사고가 잇따르는 이유다.

현재 도심 일반도로에서는 200m 간격으로 횡단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주거지역이거나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간격을 줄일 수 있다. 횡단시설에는 횡단보도뿐만 아니라 육교나 지하보도도 포함된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주변의 횡단보도 사이 최단거리는 동서로 610m, 남북으로 650m다. 두 횡단보도 중간의 지하상가가 횡단시설 역할을 해 ‘200m 간격 규칙’을 지켰다.

하지만 이러한 규칙이 오히려 보행자의 안전 불감증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 4월 20대 여성 2명이 숨지거나 다친 광주 무단횡단 사고 당시 횡단보도는 현장에서 각각 210m, 290m 떨어져 있었다. 그 대신 근처에 육교가 있었다. 차량들은 최소 500m 구간을 ‘막힘없이’ 달릴 수 있다. 반면 보행자는 멀리 돌아가야 한다.

또 어린이와 고령자 등 교통 약자는 육교와 지하보도를 건너기가 쉽지 않았다.

운전자의 안전 불감증도 사고를 키우는 원인이다. 광주 사고 당시 두 여성을 친 차량의 운전자는 시속 80km로 달리고 있었다. 해당 구간의 제한최고속도는 시속 60km다. 시야가 좁아지는 야간에 두 여성의 무단횡단을 미리 알아채기 힘든 점이 있지만 운전자가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다.

본보가 올해 1∼5월 무단횡단 사고에 대한 법원 판결 214건을 분석한 결과 운전자에게 무죄가 선고된 건 9건뿐이었다. 모두 운전자가 과속하지 않고 차로를 올바르게 주행하는 등 교통법규를 완벽하게 지킨 경우다.

○ ‘무단횡단’ 인식부터 바꿔야

도로교통법에서는 보행자가 반드시 횡단시설을 이용해 도로를 건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도 1차로 도로나 도심의 이면도로처럼 횡단시설이 없는 곳도 많다. 이 경우에는 “횡단보도가 없는 도로에서는 가장 짧은 거리로 횡단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적용된다. 하지만 도로의 규모나 차량 통행 상황 등 구체적인 기준이 없다. 경찰 관계자는 “해당 조항이 왕복 8차로나 10차로짜리 넓은 도로를 보행자가 마음껏 가로지르며 건널 수 있도록 한 건 아니다. 다만 무단횡단에 대해 현행 도로교통법에 불명확한 부분은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무단횡단하면 안 된다’ 교육에만 기댈 수 없다는 의견이다. 가장 필요한 건 횡단시설 확충이다. 정부는 2016년 도로교통법 시행규칙 개정으로 횡단시설 간 간격을 국지도로와 집산도로에는 100m까지 단축할 수 있게 했다. 이 도로들은 주택가와 상업지역처럼 보행자 통행이 잦은 곳과 간선도로를 잇는 왕복 1, 2차로짜리다. 중앙버스전용차로와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처럼 특수한 경우에는 이보다 더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육교와 지하보도 등을 모두 감안해 간격을 정한다. 순수한 횡단보도 확대에 걸림돌이다. 서울 종로와 명동 강남역 등에 횡단보도를 늘리는 것도 고객 감소를 우려한 지하상가 상인의 반발로 좀처럼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이다.

1986년 서울 강동구 올림픽대로에서 보행자들이 달리는 차들 사이로 무단횡단을 하고 있다. 당시에도 올림픽대로는 지금과 같은 ‘자동차 전용도로‘였지만 무단횡단과 자전거 통행 등 보행자의 통행이 빈번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동아일보DB
1986년 서울 강동구 올림픽대로에서 보행자들이 달리는 차들 사이로 무단횡단을 하고 있다. 당시에도 올림픽대로는 지금과 같은 ‘자동차 전용도로‘였지만 무단횡단과 자전거 통행 등 보행자의 통행이 빈번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동아일보DB
조준한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중앙분리대처럼 무단횡단 방지 시설을 늘리고 현재 3만 원인 과태료를 인상하는 등의 방법으로 보행자가 무단횡단 유혹을 단념하도록 해야 한다. 운전자가 과속하지 않고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이 필요한 만큼 보행자 스스로 무단횡단에 나서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은지 eunji@donga.com·서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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