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 프랑스 파리 경찰청은 여성의 바지 착용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여성이 바지를 입으려면 경찰청에 직접 가서 바지를 입어야만 하는 의학적 사유를 입증하고 허가증을 받아야 했다. 모든 국민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평등한 권리를 갖고자 했던 1789년 프랑스혁명 직후에 이런 조례가 만들어졌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혁명으로 어렵게 쟁취했던 자유와 평등은 오로지 남성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던 것이다.》
“여성에게 바지를 허하라”
프랑스의 ‘여성 바지 금지’ 조례가 사라진 것은 놀랍게도 불과 5년 전인 2013년. 그래서인지 여성에게 있어 바지는 때로 단순한 옷을 넘어 특별한 메시지로 읽히기도 한다.
역사적으로도 팬츠 슈트의 등장은 여성 인권 신장과 떼려야 뗄 수 없다. 1932년 디자이너 마르셀 로샤스는 20세기 초 미국과 영국에서 활동하던 여성 참정권 운동가에서 영감을 받아 최초로 여성용 팬츠 슈트를 선보였다. 이브 생 로랑의 전설적인 ‘르 스모킹(Le Smocking) 룩’ 역시 여성의 권리를 찾고자 하는 여성해방운동에 주목해 만들어진 여성용 턱시도 팬츠 슈트다.
이렇듯 패션은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해 왔다. 최근 들어 드레스나 투피스가 아닌 팬츠 슈트로 정장을 한 여성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페미니즘과 젠더리스가 우리 사회를 이끄는 하나의 키워드가 됐기 때문이 아닐까.
도시 여성을 위한 갑옷
매 시즌 컬렉션을 선보이며 누구보다 민감하게 흐름을 짚어내는 럭셔리 하우스들도 팬츠 슈트를 앞다퉈 런웨이에 세우고 있다.
샤넬은 최근 선보인 2017/18 파리·함부르크 공방 컬렉션에서 뱃사람의 복장을 고급스러운 여성용 슈트로 재해석했다. 전통적으로 남성의 직업이었던 선원의 의상인 피 코트와 드롭 프런트 트라우저, 줄무늬 톱, 모자 등을 활용해 양성적인 분위기의 컬렉션을 완성했다. ‘남성적’이라고 여겨졌던 절제된 직선 라인을 여성 슈트에 적용해 새로운 우아함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루이비통은 2018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스포츠웨어와 가죽 소재를 조화롭게 활용해 슈트와 혼합했다. 바쁜 현대인의 삶을 역동적인 모습으로 담아내 당당한 여성상을 대변했다. 무심한 듯 어깨에 걸쳐준 재킷과 곧게 뻗은 팬츠의 직선, 자연스럽고 캐주얼한 실루엣은 ‘도시 여자’의 매력을 물씬 풍긴다.
프라다의 2018 가을·겨울 컬렉션의 주제 역시 도시의 여성이다. 감각적이고 황홀한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도시의 밤, 치열한 경쟁에 뛰어든 강인한 여성들이 떠오르는 이번 컬렉션은 매일 부담 없이 입을 수 있는 현실적인 팬츠부터, 나일론을 활용한 실험적인 네온 컬러의 슈트까지 다양하다. 특히 트위드가 강렬하게 사용됐는데, 그 거친 감촉이 마치 여성을 위한 아름다운 갑옷으로도 보인다.
프로엔자 스쿨러의 2018 가을·겨울 컬렉션은 통이 넓고 편안한 실루엣으로 현대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잡아냈다. 알렉산더 왕 역시 울 소재의 팬츠 슈트에 지퍼 장식을 넣어 양성적이고 세련된 룩을 선보였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이번 시즌 광택이 있는 새틴 소재의 은색 슈트를 선보였으며, 엠포리오 아르마니는 다채로운 색상의 스트라이프 패턴을 넣은 슈트로 자칫 따분할 수 있는 정장에 화사함을 더했다.
“팬츠 슈트는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무법 변호사’에서 불의를 참지 않는 변호사를 연기한 배우 서예지의 팬츠 슈트 룩은 연일 화제가 됐다. 냉철하고 강인한 변호사 하재이의 캐릭터를 나타내는 데 팬츠 슈트가 큰 몫을 했다는 평가였다.
이렇듯 팬츠 슈트는 성공한 여성의 자신감과 카리스마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여성 정치인들이 공식 석상에서 팬츠 슈트를 선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16년 미국 대선 주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은 선거 캠페인 기간 동안 상하의가 한 쌍인 팬츠 슈트만 즐겨 입었다. 당시 클린턴의 여성 지지자들은 사회가 규정한 고정적인 성 역할에 저항한다는 의미로 ‘팬츠슈트 네이션(Pantsuit Nation)’이라는 온라인 페이지까지 만들었다.
대표적인 패셔니스타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딸 이방카 트럼프도 백악관 선임 고문 역할을 수행할 때에는 단정한 팬츠 슈트 패션을 선보인다. 왕실 결혼식의 전통이었던 ‘남편에 대한 복종 서약’을 하지 않아 화제가 됐던 영국 왕실 첫 흑인 혼혈 왕자비 메건 마클은 여성 권리 신장 운동에 앞장서 온 인물이다. 그동안 왕자비들이 공식 석상에서 주로 드레스를 입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메건은 팬츠 슈트 등을 입으며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인형의 집’을 박차고 나온 여성들은 전통적인 성 고정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국가와 사회가 여성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팬츠 슈트 역시 더 이상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 여성들은 더 활동적이고 자유로운 바지를 입고 누군가가 그어놓은 무의미한 경계를 훌쩍 뛰어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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