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엉뚱한 장면이긴 하지만 2007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세력에 납치됐던 한국인 인질 석방에 참여했던 국가정보원 요원이 낀 선글라스 역시 잊을 수 없습니다. 신원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면 언론 카메라 앞에 서지 말았어야 했는데 굳이 선글라스를 낀 채 노출을 자처했던 그 모습입니다.
굳이 옛날 기억까지 끄집어 낸 것은 요즘 정치권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인 임종석 실장의 선글라스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6일 국회 운영위원회의 대통령 비서실 국정감사에서도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거론됐습니다.
선글라스 쓴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요?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임실장이 유력한 차기 대통령 선거의 후보군에 속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겁니다. 야당들은 “대통령이 해외순방 간 사이에 비서실장이 폼 잡았다”며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 대통령의 책 ‘운명’에 나온 “비서실장이 되면 대통령 부재 중에 청와대를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따라나서기는커녕 비상근무를 하느라 더 고달팠다”는 대목도 인용됐습니다. (문재인의 운명 335페이지)
사실 임 실장은 그동안 제가 접했던 비서실장과는 사뭇 다른 스타일입니다. 대개 60~70대 원로들이 맡아왔던 자리인데 반해 1966년생인 임 실장은 올해 52세로 ‘젊은’ 실장입니다.
1995년 기자생활을 시작한 필자도 정치부 기사로 활동할 당시 많은 비서실장들과 이야기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통령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최측근 참모이니 기자들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취재원이지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비서실장들은 “비서실장은 입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비서실장은 외부로 드러나는 대외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임 실장은 다릅니다. 페이스북 등 SNS에서도 거침없는 대외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으며 특히 남북관계에서는 대통령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판문점에서 열린 4.27 정상회담 서훈 국정원장과 함께 ‘유이한’ 배석자 였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의 카운터 파트를 자임하며 4월 정상회담 당시 친근하게 말을 걸고, 김여정을 띄워주는 발언을 하는 것 역시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기기도 했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임 실장이 김여정 팬클럽 회장이라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평창올림픽을 위해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청와대를 찾았을 때 동행했던 김여정을 융숭하게 대접하고 별도의 만찬을 베푼 것 역시 임 실장이었습니다.
‘우아한’이 임 실장의 사뭇 다른 행보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남북화해협력에 미칠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9월 평양방문 당시 동대문에 차려진 프레스센터에서 시시각각 벌어지는 중요한 진전 상황의 브리핑을 도맡아 한 사람이 임 실장 이었습니다.
임 실장이 갖고 있는 타이틀 역시 남북공동선언 이행추진위원회 위원장입니다. 미국의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방한했을 때 대통령 안보실장을 제치고 제일 먼저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 역시 임 실장이었습니다.
대북정책과 남북화해협력에 있어서 임 실장은 ‘포인트 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그렇고 전 세계가 바라보는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임 실장의 실패가 대북정책의 실패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임 실장이 더욱 자중자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기회가 기적적으로 찾아온 것이고, 이 기회를 결코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문재인 정권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비서실장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 아닙니다. 자기의 목소리를 크게 내는 비서실장은 그 자리가 지켜야 할 기본 덕목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청와대를 떠난 뒤 자신의 책임 하에 하면 됩니다. 그때가 되면 그 누구도 정치인 임종석이 자기정치를 한다고 수군거리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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