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할당제’ 두고 여권 신장 외쳐도 사회는 여성을 여전히 ‘그림자’ 취급
이룬 성과 많아도 평가는 늘 박하고 ‘여성은 주연 아닌 조연’ 시선 여전
형식적 아닌 진짜 여권이 신장하려면 불평등·소외 해소를 끊임없이 외쳐야
얼마 전 큰 본회의를 작은 팀으로 나누는 방식으로 구성된 자리에 갔다. 본회의는 크니까 여성이 적지 않았다. 물론 그래도 절반이 되지 않았다. 딱 봐도 남자 서너 명에 여자 한 명 정도. 요즈음은 보통 20∼30% 정도를 소위 여성 몫으로 두는 것 같다. 반대로 말하면 남성이 70% 이상이었다는 말이다.
저 본회의는 소회의로 나누어졌고, 그 결과 모든 소회의는 전원 남성이나 여성 한 명에 남성 서너 명으로 구성되었다.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여성 한 명에 남성 두 명이 여성 두 명에 남성 여섯 명보다 나쁘다. 이렇게 한쪽 성별로 몰린 작은 구조에 들어가면 소수의 발언권은 극도로 축소된다. 한 명이면 고립되는 데다 이에 더하여 하나 있는 여성이 나이까지 어리다면 연령권력에서 다시 밀린다.
30대 여성 변호사인 나는 많은 의사결정 구조에 유일한, 혹은 둘 중 하나, 혹은 30%에 해당하는 여성으로 들어간다. 긴 인권운동과 교육의 역사가 만들어낸 ‘남자만 있으면 좀 그런 것 같다’거나 ‘여성이 30%는 있어야지’의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낸 아슬아슬한 자리. 보통 그 한두 자리가 이 시대 이 사회가 고학력 전문직 여성에게 그나마 허락하는 몫이다.
전체 인원이 몇 명이든, 연령이나 가치관이 어떻든 여성이 두 명만 있어도 숨통이 트인다. 세 명이면 ‘일이 좀 수월할지도’ 싶어진다. 나 혼자면 싸울 태세 만만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도 생각하고 말할 줄 안다는 존재증명을 할 준비를 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젊은 데다 여성이라 처음에는 공기 취급을 받을 때가 많다. 비유가 아니다. 직책이나 의전 순서대로 내가 상당히 앞에 서 있는데 상대방이 나를 아예 뛰어넘고 인사를 하거나 명함을 내미는 경험을 길지 않은 삶에 벌써 몇 번이나 했다. 중견 여성 최고경영자(CEO) 지인은 귀빈으로 자치단체장 옆에 앉아 있다가 비서로 오인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남 변호사가 함께 있으면 남성에게만 말을 거는 사람은 너무나 흔하다. 여하튼 그래서 공기가 마이크 전원 버튼을 누르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 다들 세기의 발견을 한 것처럼 깜짝 놀란다. 그 다음에 공기가 뜻밖에 일을 잘하면 (나는 대체로 일을 잘한다) 나는 공기에서 벗어나 점점 더 많은 일을 맡게 된다. 그러면 그 일들을 잘하는 동시에, 생색도 끊임없이 내야 한다. 그래야 내가 한 몫의 절반 정도가 기록에 남는다.
남성이 소수자인 모임도 어딘가 있을지 모르지만 재원 분배, 정책 결정, 공권력 행사, 경영 판단같이 거시적인 영향력이 있는 의사결정 구조에서 남성이 소수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뉴스를 틀어 계속 지나가는 회의나 행사 화면을 10분만 봐도 알 수 있다. 신문의 정치·사회면 사진에 나온 얼굴만 세어 봐도 알 수 있다. 언제나 남성이 더 많다. 지긋지긋하게 많다.
게다가 말하려는 남성은 많고 남의 말을 들으려는 남성은 적다. 수많은 회의에서, 발언권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서로 듣지는 않으며 자기 몫의 말을 늘어놓는다. 그러면 대체로 자의 반 타의 반 간사 내지 총무 역할이 되어버린 여성이 실무를 맡아 정리하는 식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아주 높다.
지금 이 말을 혹시 과장이라고 생각했다면, 멀리 갈 것 없이 지금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 성별을 다시 보기 바란다. 글을 쓸 실력과 자격을 갖춘 여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여성이 더 적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 지면은 신경을 쓴 쪽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영향력 있는 곳이 어디든 불평등한 만큼 언론에서의 발언권도 성별 불균형한 것뿐이다.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려면 끝없이 힘을 내야 한다. 내가 하는 거의 모든 사회적 발언에 “여자니까”라는 해석이 한 겹 더해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한국에서 말하는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이 각오를 하고, 그래도 다음 세대에는 여성 한 명의 자리가 더 있기를 바라며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이다. 세상이 듣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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