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명의 인생 영화]절망을 극복하는 거리 4285km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15일 03시 00분


<13> 와일드(장마르크 발레 감독)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대표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대표
소심하고 겁이 많다는 이유로 딸이 내게 붙여준 별명은 ‘쫄보’다. 별명답게 작은 일에도 전전긍긍하기 일쑤고 걱정을 사서 하며 무섭고 잔인한 영화도 제대로 못 본다.

장마르크 발레 감독의 ‘와일드’를 아무 정보 없이, 그저 평소 좋아했던 배우인 리스 위더스푼이 제작과 주연을 맡았다는 이유로 표를 끊고 객석에 앉은 나는 영화를 보는 중간까지 내내 ‘쫄았다’. 여성이 오롯이 주인공인 로드 무비가 왜, 어디가 무서워서? 그러니까 ‘여자 혼자서 처음 가보는 길을 오래오래 걷는 일’이 꽤나 두려운 것이라는 걸 건장한 남성들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텐트 안에 기어들어 온 벌레에도 놀라 뛰쳐나가는 여자, 셰릴(위더스푼 분)이 밤이면 늑대 소리를 듣고 똬리를 튼 커다란 뱀과 맞닥뜨리거나 여우를 만나며 24시간 홀로 걷는 길에 또다시 닥칠 위험들에 미리 겁을 먹고 쫄았던 셈이다.

‘와일드’는 셰릴 스트레이드라는 여성이 홀로 95일간 아메리카 대륙을 걸었던 이야기를 쓴 자전적 베스트셀러가 원작이다. 미국의 서부 해안을 따라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산맥으로 이어지는 4285km 거리의 트레킹 코스를 걷는 방대한 여정이 담겼다.

생전 처음 허리가 부러질 만큼 무거운 배낭을 메고 엄지를 들어 히치하이킹을 할 때면 ‘강간하고 죽이기 쉽게 차에 타드릴까요?’ 하고 혼잣말을 하는 이 여자는 왜 험난한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을까?

가난한 어린 시절,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둔 불우한 환경 속에서 남매를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엄마 보비(로라 던) 덕에 그럭저럭 어른이 되었던 셰릴은 엄마가 45세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만 무너진다. 너무 뻔하거나 구린가? 많은 삶은 이러하기도 하다. 스스로를 망가뜨리기로 작정한 듯 무분별한 성생활과 마약에 찌들었던 자신의 삶에 환멸을 느낀 그녀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건 수천 km를 홀로 걷는 것. 이제 ‘내가 나로서 온전히 서는 삶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각성과 변화가 찾아오진 않는다. 2분마다 포기를 생각하고 ‘내가 어쩌자고? 미쳤지’를 되뇐다. ‘언제나 그만둬도 돼’라는 자기변명도 이어진다. 길에서 만난 험상궂은 중년 남자 앞에선 있지도 않은 남편을 곧 만날 거라고 거짓말을 한다. 다행히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녀를 돕고, 그녀는 그들을 통해 변화한다. 그러나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토록 견디기 힘들었던 엄마의 죽음과 그로 인한 슬픔과 스스로에 대한 절망과 비로소 마주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내 주제에 무슨’이라고 매번 자조했던 여자, ‘엄마, 내가 포기해도 화내지 말아 줘’라고 했던 여자가 드디어 여정이 끝날 때 ‘엄마가 자랑스러워할 딸이 되기까지 4년 7개월 하고도 3일이 걸렸다’라고 말한다. 95일이라는 길 위의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고 마침으로써 수년 동안의 고통을 넘어선 것이다.

부랑자를 다루는 잡지의 기자가 느닷없이 그녀에게 묻는다. “페미니스트 같으시네?” 셰릴은 즉답한다. “맞아요.” 자신의 삶을 견딜 수 없었던 한 여자가 어떻게 스스로를 인정하고 응시할 수 있는지를 거대한 자연의 풍광과 여정 속에서 묻고 답하는 명백한 여성영화다. 리스 위더스푼의 선택으로 세상에 나온 이 영화의 각본은 저명한 영국 소설가 닉 혼비가 썼다.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대표
#와일드#장마르크 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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