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를 다룬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개봉 16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대신 우리가 치러야 했던 그 혹독했던 대가를 잊지 못하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외자를 유치하기 위한 살인적인 고금리 처방과 뼈를 깎는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길거리로 내쫓기는 가장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으니 그 고통을 어떻게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영화를 보며 눈물을 훔치는 관객들이 적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관객들은 영세 공장을 운영하며 납품 대금으로 받은 어음이 휴지조각이 돼 절망하는 갑수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대기업과 결탁해 우리나라를 IMF 구제금융의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려는 ‘재정국’ 관료들을 보며 분노하고, 이에 맞서 싸우는 한시현 한국은행 팀장을 응원한다.
‘국가부도의 날’의 흥행몰이가 이어지면서 영화 시나리오의 사실 여부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일각에서는 당시 IMF 구제금융 신청을 더 강하게 주장한 측은 한국은행이었고, 재정경제원 관료들은 오히려 구제금융을 피하려 했었는데 영화에서는 거꾸로 다뤄지고 있다며 영화의 사실 왜곡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재경원 관료들이 구제금융 신청 사실을 대기업에 미리 알려 금전적 이득을 취하도록 했다는 묘사나 미국이 한국에서 큰돈을 벌기 위해 IMF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설정은 사실을 왜곡하면서 보수-진보 진영 간 갈등을 교묘하게 부추기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이 같은 주장의 대척점에 서 있는 시각도 적지 않다. “다큐멘터리도 아닌 영화에 지나치게 엄격한 팩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이다”거나 “일부 허구적 사실이 가미됐다고는 하나 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놓고 우왕좌왕한 게 사실 아니냐. 관료와 대기업의 유착도 당시 우리 경제의 고질적인 문제였으므로 심각한 왜곡은 아니다”며 반박한다.
얼마 전에 만난 한 전직 장관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역사 고증하듯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다룬 미국 영화 ‘빅 쇼트’와 비교하며 “‘국가부도의 날’의 사실 왜곡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여기서 어느 한쪽 주장에 편들 생각은 없다. 필자가 우려하는 건 이 같은 논쟁이 ‘경제의 정치화’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는 점이다. 경제 이슈에 진영 논리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고 경제 정책을 이데올로기 프레임에 따라 찬성하고 반대하는 현상 말이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권력, 이념화된 시민단체, 권력화된 노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기득권층은 경제의 정치화를 더욱 부추긴다.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는 ‘성장은 악, 분배는 선’이라는 정치적 신념에 포획돼 있다. 택시업계의 표를 잃을까 노심초사하는 민주당 때문에 카풀 서비스가 좌절되고, 제주도가 의료관광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외국인 진료에 한해 투자개방형 병원(영리병원)을 허가하자 의료공공성을 침해했다며 뭇매를 맞고 있다. 기업의 투자를 유도하고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한 규제 완화는 대기업 특혜라는 반대 논리에 갇혀 있다.
재임 중 공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지만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는 일주일 전 물러나면서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경제에서 정치적 의사결정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경제는 이념과 프레임 논쟁에서 벗어나 경제 논리로 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경제가 정치에 발목 잡히면 국민이 고통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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