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에서 영상 취재를 할 때면 적잖은 어려움을 겪는다. 촬영 중인 카메라를 보면 운전자들은 경적을 울려대고, 창문을 내려 욕설을 하기도 한다. 이슬람 전통의상을 입은 여성 쪽으로 카메라를 향했다가 주변 남성들의 무시무시한 항의를 받은 적도 있다.
경찰, 건물 관리인들도 기자의 카메라만 보면 촬영을 막으려고 달려오기 일쑤다. 이럴 때 비상수단은 50∼200파운드(약 3000∼1만3000원)짜리 지폐. 손에 쥐여주면 슬그머니 물러난다. 처음부터 적당히 수고비를 주면 취재가 한결 쉬워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최근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수고비도 통하지 않는 취재 경험을 했다. 이집트 정부가 전국 주요 도시에 ‘노란 조끼 판매 금지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12∼14일 사흘간 카이로 시내 알 파갈라 시장을 찾았을 때다. 프랑스에서 시작돼 다른 유럽 국가의 반정부 시위로 퍼져 나가고 있는 ‘노란 조끼’가 중동·북아프리카 국가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카이로 정부는 이달 초 이 조끼의 판매를 아예 금지시켜 버렸다.
알 파갈라 시장은 산업용 부품과 기계, 안전장비 소매상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한국으로 치면 서울 종로구 청계천 상가 같은 곳이다. 약 300m 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수십 개의 가게 중 10여 곳을 찾아가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모두 거절당했다. 이들은 ‘노란 조끼’라는 단어만 나와도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다.
이집트의 최고액 화폐인 200파운드짜리 지폐를 손에 쥐여줘도 소용없었다. 모두 돈을 물리며 “나가라”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미처 판매대에서 노란 조끼를 치우지 않은 가게도 있어 가격을 물어보자 “팔지 않는 물건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일부 상인들의 얼굴에서는 공포감까지 엿보였다.
찾아간 가게에서 모두 쫓겨난 뒤 길에서 안전모를 파는 상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사복 경찰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노란 조끼를 사거나 파는 사람을 붙잡으려고 순찰을 돌고 있어요. 경찰에 체포되고 싶어서 이러고 있나요? 아무도 안 팔 겁니다. 절대로요. 1월 25일 전까지는 절대 살 수 없을 겁니다.”
1월 25일은 이집트 아랍의 봄(2011년) 기념일이다. 당시 이집트 시민들은 민주화 혁명을 통해 호스니 무바라크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고, 이듬해 대선에서 첫 민선 대통령을 선출했다. 지금 이집트 정권을 잡고 있는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은 당시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가 임명한 국방장관이었다. 그는 2013년 7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시시 대통령은 주말마다 노란색으로 뒤덮이는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보며 2011년 성난 시민들로 가득했던 카이로 광장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이집트 정부는 매년 아랍의 봄 기념일을 전후해 카이로 시내 주요 광장 및 거리마다 경찰과 군대를 배치한다. 그런데 올해는 주요 거리마다 경찰 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감시와 탄압은 더욱 삼엄해졌다.
정부의 감시를 받는 이집트 주요 신문 국제면은 프랑스 노란 조끼 시위를 보도하면서 ‘불법 시위로 파리가 고통받고 있다’는 식의 부정적 제목을 뽑는다. 더럽혀진 도로, 발길 끊긴 관광지 등을 조명한다. 망가진 도로를 청소하는 사람들의 모습, 유리창이 깨진 가게 모습 등에 기사의 초점을 맞춘다.
국제 사회에서는 이집트 시시 대통령이 30년 독재자인 무바라크 전 대통령보다 더 잔혹한 통치를 하고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인권단체들이 ‘수십 년 만의 최악의 인권 위기’라고 표현할 정도다. 알 파갈라 시장에서 만난 상인들의 얼굴에 묻어난 불안을 보며 정부에 대한 공포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시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지 약 8개월이 지났다. 그런데 이집트에서는 벌써부터 그의 차기 대선 출마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현행 이집트 헌법상 대통령은 4년 임기로 한 차례만 연임할 수 있는데 이 법이 곧 개정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사실이라면 시시 대통령의 장기 집권 토대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알 파갈라 시장에서 사라진 노란 조끼처럼, 이집트에서 민주화 열기도 점점 더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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