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 아래서]〈17〉지갑 속 옛 ‘애인’ 사진을 버려야 할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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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
신이현 작가
“왠지 그 땅을 잊을 수가 없어.”

레돔이 이렇게 말했을 때 얼굴에 깊은 상실감이 느껴졌다. 실패한 첫사랑을 다시 소환하여 추억을 되씹는 표정 그대로였다. 첫사랑을 가슴에 끌어안고 사는 것처럼 이제는 그 땅을 잊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땅은 인연이 닿아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2년 정도 찾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농사는 남의 땅에서 계속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뒤 우리는 참 많은 땅을 보러 다녔다. 너무 산꼭대기라 서 있으면 아래로 곤두박질칠 것 같은 땅들이 가장 많았다. 비가 오면 물이 고여 호수가 되는 곳, 전망은 좋으나 깊이 응달진 곳, 빛은 좋으나 고속도로 아래거나 축사 옆, 모든 것을 다 갖췄으나 양조장을 지을 수 없는 지목 등…. 그 옛날 선을 백 번 이상 보았던 친구가 생각났다. 땅이 나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불원천리 달려가며 ‘아, 이번에는…’ 하고 가지만 대체로 실망만 안고 돌아온다. 선을 본 사람의 리스트는 점점 늘어가지만 결혼의 날은 더욱 멀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눈높이를 낮춰야지. 그러다 혼자 늙어 죽는다.”

백 번 선 본 친구에게 했던 그 말이 땅을 찾는 데도 통하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원하는 땅은 심플했다. 뒤로는 작은 산에 감싸인 야트막한 언덕, 앞으로는 확 트여 빛이 잘 들고 바람 길이 막히지 않아 비가 온 뒤 습기가 남아있지 않고, 주변 환경이 깨끗하고 조용한 그런 곳…. 우리의 염원에 다들 그런 완벽한 인연은 절대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한번은 꼭 마음에 드는 땅을 만났다. 모든 조건에 부합했다. 이상형. 말 그대로 첫눈에 반했다. 두근거리고 흥분되었다. 이 남자를 놓치면 난 죽어 버릴 거야. 누군가 그 남자를 채어가 버리진 않을까 불안해서 빠르게 결혼 날짜를 잡고 일을 추진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 암초가 있었다. 결혼을 반대하는 시부모의 세력이라고 해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과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징크스에 걸린 것이다.

그 땅은 임대 중이었고 내년 말까지 계약된 작약이 심겨 있었다. 땅을 사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일단 땅을 매입하고 1년을 기다리기로 했다. 다들 작약 농부에게 계약 기간 만료 시 작약을 뽑는다는 확약서를 받아두라고 권했다. 내 땅이라도 남이 심은 농작물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법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작약 농부는 확약서에 사인하기를 거부했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나갈 것인데, 왜 이런 것을 해야 하느냐고 화를 냈다.

“그 땅 사면 앞으로 고생길이 쭉 뻗었다.”

모두가 말리는 결혼을 앞둔 것이었다. 우리는 다른 땅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속 그 땅이 눈에 아른거렸다. 한번 마음을 주면 쉽게 돌아서지 못하는 레돔은 가슴앓이를 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끝까지 가보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더 좋다 싶은 땅을 대령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그 작약 땅이 더 좋다는 것이었다.

“당신 참 바보 같은 남자네. 잊을 건 잊어야지 쓸데없이 미련이 너무 길어.”

나는 벌컥 짜증을 냈다. 시작한 김에 꼬챙이를 들고 그를 쑤셔대기 시작했다.

“그 옛날 거시기, 그 여자 이름이 뭐였지? 세실리아 땅콩인가 뭔가, 아직도 사진 가지고 있는 거 다 알아. 그 여자랑 결혼하지. 왜 나랑 해서 이 고생을 시키는 거야? 그 땅콩 사진 다시 찾으면 다 찢어 버릴 거야.”

내가 이렇게 나오면 그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입을 다물어 버린다.

과연 우리는 땅을 찾을 수나 있을지, 그날이 언제일지, 그 인연은 어디에 꼭꼭 숨어서 이렇게 애를 태우는 것일까. 빨리 나오너라, 오버.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이상형#첫사랑#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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