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의회 뒤편, 의회도서관 바로 옆에는 주변 건물에 비해 규모가 작은 4층짜리 연방대법원 건물이 있다. 미국 건국 이후 100년 넘게 의회 건물에서 곁방살이를 하던 연방대법원이 1935년 4월 행정부, 입법부에 이어 공간적으로 독립한 곳이다.
이 건물 동쪽에 연방대법원장 집무실이 있다. 그 집무실 외벽 남쪽과 북쪽 코너 맨 위에 동물 모양 장식이 붙어 있다. 의회와 가까운 남쪽 코너의 장식은 앞발을 들고 뛰어가는 모습의 토끼다. 북쪽 코너 장식은 고개를 들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거북이 모양이다. 마치 토끼와 거북이가 양쪽 끝에서 경주를 막 시작하는 것 같다.
사법부 건물 독립 당시 미국의 유명 조각가가 이솝우화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에서 영감을 얻어 새겼다고 한다. 우화에 나오는 “느리더라도 꾸준하면 경주에서 이긴다(slow and steady wins the race)”란 문구처럼 사법부는 천천히, 그러나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는 점을 상징한다.
윌리엄 태프트 전 연방대법원장이 이 건물을 짓도록 의회에서 예산을 따내고, 이 조각을 새긴 건물의 설계도를 승인했다. 한국 사법부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2011년 9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미국에선 태프트 전 연방대법원장이 존경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대법원장 재직 중에는 태프트 전 연방대법원장에 대해 “가장 존경하는 분”이라고 했다. 상고심 개혁을 추진했던 태프트 전 연방대법원장은 꾸준히 변호사단체와 대통령, 의회를 설득해 끝내 목표에 도달했다.
반면 양 전 대법원장은 상고법원 도입을 추진하면서 법무부를 통한 정부입법 대신 의회입법이라는 편법을 동원하고, 변호사단체를 압박하다가 결국 재판 개입 및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의 피의자 신분이 됐다. 태프트 전 연방대법원장을 가장 존경한다면서 그의 ‘거북이걸음’은 본받지 못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어떨까. 요즘 진보 성향 판사들 사이에선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말이 회자된다. 그 발단은 김 대법원장이 초대 회장을 지낸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 김기영 헌법재판관이 올 9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한 발언이다. 김 재판관은 당시 ‘고슴도치 정의론’이라는 말을 했다. 그것은 감명 깊게 읽었다는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이 쓴 ‘정의론’에 나온 얘기다. 이 책을 보면 고슴도치와 여우형 인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는 그리스 시인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여우가 아무리 교활한 꾀를 부려도 맹수에게 붙잡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확실한 호신법으로 살아남는다는 취지라고 한다.
김 재판관은 인사청문회 때 긴급조치의 국가 책임을 부인했던 대법원 판례에 반한 판결을 내렸을 때를 회고하며 “모든 승진을 포기하는 심정이었다”고 했다. 자신을 고슴도치형 법관에 비유한 것이다.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인 김상환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때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댓글 사건 항소심 재판장으로서 원 전 원장을 법정 구속했던 그는 판결 당시를 되돌아보며 “한 점 부끄러움 없이 그 사안에 대해 충실하게 임했다”고 말했다.
이른바 ‘여우형 법관’이 몰락한 자리를 재판 하나만 생각한 ‘고슴도치형 법관’이 하나씩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법부 독립을 지키는 것을 넘어 흔들리는 사법부를 추스르고, 사법개혁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는 시점에서는 고슴도치만으론 부족한 것 같다. 법관 탄핵과 사법행정 개혁 방향을 두고 조금씩 새어나오는 법원 내 파열음을 보면, 적어도 고슴도치처럼 보이는 여우나, 여우 같은 고슴도치가 더 필요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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