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을 지속할지를 판단하기 위한 시한을 내년 3월경으로 잡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한국 정부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내년 초 북-미 간 실질적인 비핵화 협상이 재개되지 않을 경우 북-미 갈등이 심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어렵사리 조성한 한반도 대화 기류 및 남북 관계 유지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 곳곳에서 “시간이 얼마 없다”는 말이 들리고 있다.
24일 복수의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의 19∼22일 방한 기간에 한미 당국은 북-미 비핵화 협상을 촉진시키기 위한 방안을 집중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비건 대표는 남북 철도·도로 연결 착공식 제재 면제 조치, 대북 타미플루(독감 치료제) 지원 허용 등을 공식 발표하면서 한국 정부에도 교착 상태를 풀기 위한 역할을 당부했다고 한다. 대북제재를 저촉하지 않는 범위에서의 인도적 지원 등 남북 교류가 북-미 비핵화 협상의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올해 말까지 타미플루 20만 명분을 북한에 보내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가 올해 처음 대북 인도적 지원에 나서는 것이다. 타미플루 20만 명분은 연내 경의선 도로를 통해 북한에 전달될 것으로 보인다. 남북은 시간 절약 등을 위해 별도 회의 없이 문서 교환으로 실무작업을 마치기로 했다. 타미플루가 북한에 지원되는 것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12월 50만 명분의 치료제가 넘어간 이후 9년 만이다.
정부가 비건 대표 발표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타미플루 대북 공급 계획을 마련한 것은 뭐든 가시적인 조치를 취해야 내년 초부터는 비핵화 협상의 동력을 재점화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은 무산되고 북-미 간 대화 중단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정부 내에서도 과연 비핵화 협상 무드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한 해에 남북 정상회담을 세 차례나 할 정도로 고강도 대화 카드를 썼지만 북-미 간극은 여전한 상황인 만큼 한국 정부가 타미플루 긴급 북송 정도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겠느냐는 회의감도 감지되고 있다. 게다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자체 설정한 비핵화 협상 데드라인인 내년 3월은 마침 내년 한미 주요 군사훈련의 재개 여부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시점이기도 하다. 그만큼 내년 초가 되면 북-미, 남북 간 신경전이 최고조에 이를 수 있다는 것. 이와 관련해 아산정책연구원은 내년도 전망보고서에서 “미국은 내년 3월까지는 협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한미 연합훈련인 키리졸브·독수리 훈련을 연기할 가능성이 높지만 이후에도 실질적인 비핵화 협상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올해 중단했던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훈련을 내년 8월엔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북한의 눈치만 보지 말고 적극적으로 비핵화에 나서라고 김 위원장에게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잇따르고 있다. 박휘락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는 “정부는 북한이 핵무기 폐기를 하지 않는 한 추가적인 대북 지원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천명해야 한다. 심지어 9월 평양정상회담에서 북한과 체결한 남북 군사합의도 재검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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