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에 속한 룽징(龍井·이하 용정). 이곳을 방문하는 많은 한국인에게는 타국으로 비치지 않는다. 벼논으로 뒤덮인 넉넉한 들판, 떡갈나무와 소나무가 군데군데 군락을 이룬 야트막한 야산과 구릉, 시내를 가로질러 유유히 흘러가는 강줄기 등은 정겨운 우리 농촌의 풍경과 다를 게 하나 없다. 소마저 한국의 들판에서 볼 수 있는 누렁 황소다.
산과 들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용정 주민 중 대다수는 우리와 같은 핏줄인 조선족이다. 거리의 간판에는 한글이 쓰여 있고, 그 밑에 중국식 한자(간자체)가 작게 표기돼 있다. 낯설지 않은 환경에서 우리말로 된 간판을 읽다 보면 마치 한국의 조그만 소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다.
일제강점기 한인(韓人)들은 피땀 흘려 옥토로 바꿔 놓은 용정을 남의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용정까지는 120리(약 47km) 길, 걸어서도 한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이웃 지역이었다. 한인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간도(만주)로 이동할 때 “건너간다”거나 “들어간다”라고 표현했다. 타국으로 이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 마을을 드나드는 정도로 여겼다. 본국(本國)의 고향에서 3·1독립만세 운동이 전개됐을 때 용정이 적극적으로 동참한 것은 이처럼 지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이다.
올해 기자는 용정의 독립만세운동 현장을 찾기 전,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비암산 정상에 올랐다. 국민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一松亭)이 우뚝 서 있는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서는 평야 지대에 조성된 용정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선구자’에 등장하는 한 줄기 해란강이 천년 넘게 흐르는 모습도 보이고, 저녁 종소리로 비암산을 아련하게 울리던 용주사 터도 가까이 있다. 다만 기자가 정작 만나고 싶은 ‘해란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항일 독립투사)’의 모습은 지난 100년간 ‘거친 꿈’처럼 깊이 잠들어 있다.
○ 북간도의 기백
약 100년 전인 1919년 2월 중순, 독립만세운동의 열기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용정과 옌지(延吉·이하 연길) 등 만주 벌판까지 달구어 나갔다. 두만강 대안(對岸) 북간도의 민족지도자들은 그해 2월 8일 일제 심장부 도쿄(東京)에서 본국의 젊은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거행했다는 감격적인 소식을 들은 데 이어, 본국 수부(首府)인 경성에서도 만세운동이 곧 시작된다는 비밀통신도 접했다.
용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일제강점 10년 만에 맞이한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간 북간도의 한인들은 친일파 중국인 장쭤린(張作霖)이 이끄는 군벌 세력과 실제적으로 만주를 지배하는 일제로부터 이중 압박을 받아오면서 움츠러들어 있었다. 자연히 항일 독립운동도 크게 위축돼 있던 터다. 그런 상황에서 본국과 일본에서 발화된 만세운동은 간도에서 독립투쟁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훌륭한 ‘불씨’였다. 이에 따라 ‘가만히 있기를 처녀같이’ 처신하던 간북(墾北·북간도) 인사들이 ‘달리는 토끼’처럼 날쌔게 움직이기 시작했다.(계봉우의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 독립신문 1920년 1월 10일자)
1919년 2월 18일과 20일, 연길현 국자가(局子街) 하장리(下場里) 박동원의 자택에서 연길, 용정 등 북간도 지역을 대표하는 33명의 지도자가 모였다. 이 비밀 회합에서 간도 지역의 모든 한인단체와 지역이 연대해 독립만세운동을 펼칠 것을 결의했다.
만세운동 집결지로는 용정이 지목됐다. 용정은 한민족의 북간도 개척사에서 가장 오랜 도시이자 한인들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일제도 본방인(本邦人·조선인과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곳에 총영사관을 설치한 뒤 만주 침략의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일제는 총영사관 내에 막강한 경찰 조직과 수감 시설까지 갖추고 밀정들을 부리면서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탄압했다. 그렇기에 북간도 지도부는 의도적으로 이 지역에서 독립선언을 함으로써 일제 통치를 정면으로 거부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자 했다.
○ 해란강의 봄 축제
용정의 독립만세운동은 본국 및 러시아 연해주와 연대해 펼치는 것으로 계획됐다. 이를 위해 김약연, 정재면, 강봉우 등을 본국과 연해주에 파견해 놓고 있었다. 달이 바뀌어 3월의 첫날, 경성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됐으나 북간도 지도부는 알지 못했다. 파견된 동지들의 소식도 없었다.
그 며칠 후인 7일, 본국의 독립만세운동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갔던 강봉우가 드디어 돌아왔다. 용정의 영신학교 교감인 강봉우는 간도의 주요 동지들에게 격문을 보내 연길 국자가로 모이라고 했다. 그는 회의에 참석한 동지들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본국 만세운동과 향후 계획을 상세히 보고했다.
북간도의 지도자들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했다. 즉시 ‘독립운동기성회’라는 조직을 결성, 3월 13일 용정에서 단독으로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확정했다(일본 외무성, ‘본방인재류금지관계잡건(本邦人在留禁止關係雜件) 기밀 제19호’).
용정 북쪽의 서전벌(서전대야)에서 ‘조선독립축하회’라는 이름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용정의 한인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독립선언서와 대회 개최 통지서 등의 문건들은 은진중학교 지하실에서 등사된 후 북간도 전역으로 릴레이식으로 전달됐다. 각급 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회 경비와 안전을 책임지는 ‘충렬대’ ‘자위단’ 등이 조직되고, 군중을 대상으로 항일운동을 선전하는 ‘강연단’까지 가동됐다. 용정에 거주하는 의병 출신 한학자 김정규는 일기장(양력 3월 11일자)에서 당시 상황을 기술했다.
“지사(志士)와 인인(仁人)들이 비밀리에 회의를 갖고 오는 12일(양력 3월 13일) 갑자일에 사람마다 태극기를 들고 곧장 일본영사관이 있는 용정시로 가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날 일본과 경성·평양·원산·부산·대구, 그리고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도 같은 소리로 이 거사를 하기로 하였다. 이는 우리 이천만 동포가 기사회생하는 날이니 어찌 맹렬히 일어나 각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환호작약하면서 동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황천이 우리 한인을 불쌍히 여겨 태운(泰運·커다란 운수)을 열어주는구나’라고 했다.”
1919년 3월 13일, 바로 그 태운의 날이 왔다. 그런데 아침에 개었던 날씨가 갑자기 급변했다. 황진과 굵은 모래바람까지 휘몰아쳤다. 회오리바람이 어찌나 세차게 불던지 하늘의 구름 떼가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서전벌에는 수많은 한인들이 조금의 동요도 없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오히려 밝은 화색이 감돌고 있었다.
용정에서 30리 거리의 명동학교 학생들은 인근의 농민들과 함께 1000여 명의 대오를 이뤄 서전벌에 도착했다. 두만강변의 자동에 위치한 정동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북을 울리면서 하룻밤을 꼬박 걸어 당일 아침에 도착했고, 용정 시내의 은진중학교를 비롯한 동흥학교, 대성학교 학생들도 속속 대회장으로 모여들었다. 훈춘(琿春)과 안투(安圖) 등 먼거리 지역의 사람들은 거사 전날 이미 도착해 용정 사람들과 함께 행사 준비를 했다. 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각지의 모든 한인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서전벌로 모여든 것이다.
인산인해를 이룬 이날의 군중 수가 얼마인지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계봉우가 쓴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에서는 3만 명 이상이라고 추산한 반면, 일제 보고서는 6000명으로 축소돼 있다. 중국 당국의 기록에는 2만여 명으로 집계돼 있다. 분명한 것은 북간도의 궁벽진 산촌에 사는 아낙과 초동목아(樵童牧兒)까지 한마음으로 나선 거족적 운동이라는 사실이다.
정오가 되자 시내 교회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신호로 ‘조선독립축하회’가 시작됐다. ‘대한독립’과 ‘정의인도’라고 쓰인 두 개의 오장기(五丈旗)가 나부끼는 곳을 중심으로 서전벌의 군중이 둥글게 모여들었다. 대회 부회장 배형식의 개회 선언과 함께 대회장 김영학이 ‘간도거류 조선민족 일동’ 명의로 된 ‘독립선언 포고문’을 낭독하였다. 독립을 ‘선언’하는 게 아니라 ‘선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행사는 당연히 조선독립을 기념하는 축제 분위기였다.
“포고문 낭독이 끝나자마자 군중은 ‘기뻐서 흐느끼고(喜而泣) 흐느끼면서 뛰며(泣而蹈)’ 태극기를 흔들었다. 용정 시내 800여 호의 한인 가옥마다 내걸린 태극기들도 모래를 날리는 광풍 속에서 힘차게 펄럭였다.”(‘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
군중은 천지가 진동하듯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눈 녹은 해란강의 첫봄을 알리는 우레처럼 만세운동 함성은 용정의 비암산까지 메아리쳤다. 독립축하회를 마친 군중은 ‘대한독립’이라 크게 쓴 깃발을 앞세우고 거리 시위에 들어갔다. 명동학교와 정동학교의 교원과 학생 320여 명으로 조직된 충렬대(총대장 김학수)가 앞장서고 북과 나팔을 멘 악대가 시위대를 이끌었다. 시위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총영사관이 있는 쪽으로 행진했다.
○ 중국 군벌과 일제의 결탁
일제는 마냥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다. 일본 외무성과 군부에서는 간도의 조선인 거사 정보를 일찌감치 입수해 중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이를 빌미로 군대까지 투입하려는 일제 동향을 파악한 동북군벌 장쭤린은 한인의 독립운동에 대해 강경한 조치로 탄압할 것과 일본영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지시했다.
이에 따라 연길 도윤(道尹·행정책임자) 장스취안(張世銓)은 상급 기관의 지령과 일본 영사관 측의 압력에 굴복해 조선인의 독립운동에 대해 동정하고 지지하던 태도마저 바꾸었다. 장스취안은 장쭤린의 휘하인 멍푸더(孟富德)를 용정촌 군경 총지휘관에 임명해 조선인들의 거사를 제지하라고 지시했다.
거사 당일인 3월 13일, 중국 군경은 모든 시가지와 골목골목을 엄중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이때 서전벌 행사를 마치고 커다란 파도같이 밀려드는 시위대를 맞아 어쩔 줄 모르던 멍푸더는 휘하 군사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시위대 중에는 용정 동산학교와 연길 도립중학교에 다니는 한족(漢族) 학생들도 다수 끼어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총성이 한동안 울렸다. 순식간에 무수한 시위 군중이 쓰러졌다. 중국 군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13명의 시위대원이 희생되고 3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체포된 사람만도 300명이 넘었다. 부상자들은 즉시 제창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다. 치명상을 입은 6명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던 중 숨졌다. 결국 이날 시위운동으로 공덕흡을 비롯한 19명이 순국하였다.
이와 관련, 일본영사관에서 파견한 순경(사복 경찰)들도 중국 군경 틈에 숨어 있다가 총질에 가담했다는 증언도 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허춘림은 “(일본) 순경들은 멍푸더 부하의 헛총질에 시위대가 혼란해진 틈을 타 권총으로 시위자들을 쏴죽이고 부상을 입혔다”고 말했다.(김동화, ‘연변역사연구’)
3·13 시위운동 희생자들의 유해는 3월 17일 5000여 한인의 애도 속에 용정 동남쪽 교외의 양지바른 언덕에 안장되었다. 기자는 용정에서 시인 윤동주의 고향인 명동촌으로 가는 길 왼쪽 산자락에 자리한 ‘3·13 반일의사릉’을 찾았다. 기념비를 중앙에 두고 앞줄에 9기, 뒷줄에 4기 등 현재 13기의 능이 조성돼 있었다. 이 능은 일제강점기에도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용정으로 향하는 동포들이 반드시 참배하던 순국묘역으로 기려졌다. 기자는 능 앞에서 참배하면서, 이들이야말로 해란강변을 누비던 진정한 선구자이자 독립투사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들의 희생은 만주 벌판 한인들의 울분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그해 5월 말까지 훈춘을 비롯해 북간도 전역에서는 50여 회에 이르는 크고 작은 만세운동이 전개됐고 무려 7만5500여 명이 시위에 가담했다(‘독립운동사 사료’ 제6집). 그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반일독립운동은 이후 중국인들에게도 큰 공감을 불러일으켜 중국의 반제반일투쟁인 5·4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중국 측 보고서(조문기, ‘중국 東北의 조선족과 3·1운동’)도 있다.
또한 3·13만세운동을 기점으로 북간도의 평화적 시위는 무장투쟁으로 확대 전환하게 된다. 1920년 1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은행권 15만 원을 쟁취한 이른바 ‘15만 원 탈취 사건’은 용정 3·13만세운동에 참여한 ‘철혈광복단’ 학생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봉오동전투(1920년 6월)와 청산리전투(1920년 10월) 같은 무력 항일투쟁도 용정 만세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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