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사는 구두수선공 김성기 씨(72)는 매주 금요일 오전 9시 자신의 소형 승용차에 시동을 건다. 그가 향하는 곳은 차로 10분 남짓 떨어진 은평구 불광동의 한 다세대 빌라. 빌라 앞에는 검은 배낭을 멘 한 중년 남성이 서 있다. 시청각 중복장애인인 박영수(가명·56) 씨다.
김 씨가 내려 박 씨의 손을 잡으면 아무런 표정이 없던 박 씨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앞을 보지도, 들을 수도 없는 박 씨를 데리러 온 김 씨 역시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없는 농아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만지며 대화한다. 이를 ‘촉수화’라고 한다.
김 씨가 박 씨를 차에 태우고 매주 금요일마다 찾는 곳은 서울 동작구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열리는 시청각 중복장애인들의 자조 모임 ‘손잡다’다. 지난해 4월 시작된 ‘손잡다’는 국내에 두 개뿐인 시청각 중복장애 자조 모임 중 하나다.
김 씨는 “수년 전 농아인 모임에서 박 씨를 처음 만났는데 눈까지 보이지 않아 늘 집에만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며 “도움을 주고 싶어 매주 ‘손잡다’ 모임에 데려다주고 있다”고 말했다. 일주일의 대부분을 15평 남짓한 집 안에서 보내는 박 씨에게 김 씨는 자신을 세상과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이다.
○ 어둠에 갇힌 시청각 중복장애인의 삶
박 씨는 어릴 적 귀를 다쳐 농아인이 됐다. 간단한 수화로 가족과 의사소통을 하며 살았다. 하지만 성인이 된 뒤 점차 시력을 잃는 유전병이 발현해 10년 전부턴 앞을 전혀 보지 못한다. 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자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암흑의 세계에 갇혔다. 아내는 떠났고 자녀들이 일을 나갈 때면 그는 늘 혼자였다. 가끔 바람이라도 쐬고픈 마음에 집 밖으로 나서 보지만 화를 당하기 일쑤였다.
박 씨의 딸은 “아빠가 오토바이에 치이거나 차바퀴에 발이 깔리는 등 크고 작은 사고를 많이 당했다”며 “주변을 더듬다가 오해를 사 폭행을 당한 적도 있다. 장애인인 걸 알고는 뒤통수를 후려치고 도망간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백화점 판매직원으로 일하는 박 씨의 딸이 근무 도중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뛰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박 씨의 집엔 온갖 종류의 상해로 병원을 다녀온 영수증이 한 묶음 쌓여 있다.
박 씨는 하루 8시간 일상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활동지원사’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제도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한다. ‘손잡다’ 모임에 나가면서 비로소 활동 지원 제도를 알게 됐다. 뒤늦게 활동지원사를 신청했으나 심사 기간만 수 주가 걸렸다. 심사 담당 직원이 여러 차례 그의 집을 찾아와 초인종을 눌렀지만 그는 ‘띵동’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극도의 고립감과 고독감 속에 살아가는 시청각 중복장애인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인 ‘손잡다’ 모임은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이다. ‘손잡다’에서는 서로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10여 명이 모여 촉수화로 소통한다. 이 모임은 서울맹학교를 졸업하고 숭실대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청년 시청각 중복장애인인 조원석 대표(26)가 이끌고 있다. 조 대표는 ‘손잡다’에 온 시청각장애인들에게 직접 점자와 수화를 가르쳐주고 각종 복지 혜택을 안내한다.
○ 사각지대에 놓인 한국의 ‘헬렌 켈러들’
흔히 시청각장애를 ‘시각+청각’ 장애로 생각하지만 시청각 중복장애는 시각이나 청각장애와는 전혀 다른 가장 심각한 중증 장애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나 국내 장애인 관련법에선 시청각 중복장애인들을 위한 별도의 규정이나 맞춤형 제도가 없다.
김종인 나사렛대 재활복지대학원장은 “시청각 중복장애인들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맹학교나 (청각장애인을 위한) 농학교 중 한 곳을 선택해 찾아가지만 어디서도 제대로 된 교육이나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통상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는 청각 위주의 교육과 서비스가 이뤄지고 청각장애인을 위해서는 시각 위주의 교육이나 서비스가 제공되는데, 시청각 중복장애인은 양쪽 어느 쪽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은 법률로 시청각 중복장애를 별도 유형의 장애로 규정해 지원하고 있다. 헬렌 켈러를 계기로 세계에서 가장 앞선 시청각장애인 교육 및 지원 제도를 갖춘 미국에서는 시청각장애아가 태어나면 전문특수교사가 가정을 방문해 촉각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고 소통하도록 교육한다. 국립 헬렌켈러센터는 시청각장애인이 스스로 쇼핑을 하고 요리를 하는 등 자립할 수 있도록 생활교육을 제공한다.
내년에 입법이 추진되는 한국판 ‘헬렌켈러법’(가칭)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담길 것으로 전망된다. 법안 초안은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맞춤 의사소통 체계 수립 △활동지원사와 시청각통역사 양성 △시청각장애인들이 참여하는 조직의 결성 및 지원 △시청각장애인의 발굴 △별도의 교육 정책 강구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김 원장은 “한국판 헬렌켈러법은 이들을 밖으로 불러내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해주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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