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極樂)에는 삶은 돼지머리와 해맑은 삼해주(三亥酒)가 있는가? 만일 그런 것들이 없다면 비록 극락이라 하더라도 나는 가지 않겠네.”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조선 초기 문신 서거정(1420∼1488)은 ‘돼지’를 극락세계의 첫 번째 조건으로 꼽았다. 조선시대에도 잔칫날이면 빠지지 않는 음식이 돼지고기였다. 돼지에 관한 즐거운 이야기는 음식에 그치지 않는다. 돼지꿈을 꿨다면 복권 당첨 같은 대길(大吉)을 바란다. 이처럼 돼지는 풍요와 다산(多産), 행운 등 긍정적 인식이 가득한 동물이다.》
돼지해는 12년마다 돌아오지만 2019년 기해(己亥)년은 60년 만에 찾아온 ‘황금돼지해’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조합한 간지(干支)력을 사용하는데, 10개의 천간에서 ‘기(己)’는 노란색을 나타낸다. 2007년 정해년도 황금돼지해로 알려졌지만 사실 ‘정’의 색상은 적(赤)색이다. 12년 전 ‘붉은돼지해’가 황금돼지해로 둔갑한 건 빨간색을 부(富)와 동일시하는 중국 문화의 영향이 컸다는 분석도 있다.
○ 인간과 돼지의 2000년 동고동락
집을 뜻하는 한자 가(家)는 지붕 ‘宀’ 밑에 돼지 ‘豕’가 함께 사는 모습을 표현한 상형문자다. 지금도 전북 남원지역과 제주도, 일본 오키나와, 중국 산둥(山東)성 등지에는 친환경돼지 변소인 ‘돗통시’가 남아 있다.
한반도에서 돼지를 집에서 키우기 시작한 것은 약 2000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한조에는 “주호(州胡·제주도)에서는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는 기록이 나와 있어 철기시대 이후 돼지의 완전한 가축화가 이뤄진 것으로 학계에선 보고 있다.
우리나라 재래종 돼지는 조선 후기까지 사육했지만 이후 외래종이 들어오며 점차 사라졌다. 현재 국내에서 주로 사육하는 돼지는 랜드레이스종(덴마크)과 요크셔종(영국) 등 새끼를 많이 낳고 생장속도가 빠른 외국 품종이 대다수다. 최근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토종 돼지로는 경북 김천시의 지례돈(知禮豚)과 경남 사천시의 사천돈(泗川豚) 등이 있다.
곽승현 선진기술연구소 양돈기술개발팀장은 “우리나라 재래 돼지는 서양 돼지보다 몸집은 작지만 지방 함량이 높아 고기 맛이 우수하다. 고급육 생산을 위한 주요 품종으로 최근 각광받고 있다”며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한 양돈장이 증가하는 등 동물 복지를 증진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한국 양돈업계에서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직접 돼지를 키우는 집은 줄어들었지만 ‘돼지저금통’ 등 재물과 관련한 상징물로 돼지는 여전히 함께한다. 돼지 모양 저금통의 기원은 18세기 잉글랜드. 한 도공이 ‘pygg’라는 오렌지색 점토를 ‘pig(돼지)’로 잘못 알아들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돈(豚)-돈(金) 발음 같아, 복의 상징으로
신화와 설화 속 돼지는 중요한 장소를 알려주는 능력자 혹은 신의 제물로 등장한 경우가 많다. ‘삼국사기’에는 수도를 점지하는 돼지의 신성한 모습이 표현돼 있다. 이 책의 고구려 유리왕편에는 제물로 바치기 위해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 이를 잡아오라고 지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 관리가 국내성 위례암에서 겨우 잡았는데, 이곳의 산세와 지세가 뛰어나 왕에게 알려 수도를 옮겼다고 한다.
지금도 고사나 굿을 지낼 때면 돼지머리를 빼놓지 않는데 조선시대 기록인 ‘동국세시기’에도 12월 납향(한 해 동안 겪은 일을 고하는 제사)의 제물로 산 돼지를 바쳤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천진기 국립전주박물관장은 “돼지가 재물과 복의 상징물로 여겨진 것은 집안의 중요한 자산인 데다 ‘돼지 돈(豚)’과 ‘돈(金)’의 발음이 같은 이유도 있었다”며 “강한 번식력을 가진 돼지가 풍년이나 번창을 가져온다는 인식이 현재까지 전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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