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둥글다지만, 아시안컵은 그래도 이상하다. 한국은 아시아 축구의 맹주다. 9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고, 2002년에는 4강까지 올랐다. 아시아에서는 별 적수가 없다. 그런데 아시안컵 성적은 기대 이하다. 1960년 2회 대회 이후 우승과 인연이 없다. 그래서 벤투호가 ‘59년 만의 우승’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이번 대회에 나선다.
설사 운이 없었다고 해도 58년은 너무 가혹한 시간이다. 합리적으로 설명이 안 될 때 인간이 찾는 게 미신이다. 축구인들은 아시안컵 징크스를 ‘가짜 금메달의 저주’로 설명한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그 유명한 ‘밤비노의 저주’ ‘염소의 저주’ 같은 게 우리 스포츠에도 있다.
한국은 1956년 초대 아시안컵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2회 대회(1960년) 주최국이 된다.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는 국가의 명예가 달린 문제였다. 없는 살림에도 국제규격 축구장인 효창구장을 새로 짓고, 우승팀에 순금 메달을 수여하기로 했다.
한국은 자유중국(대만), 월남(베트남), 이스라엘 등을 꺾고 2회 대회에도 정상에 올랐다. 금메달을 받아 든 선수 한 명이 “순금인지 보자”며 벽에 메달을 긁었다. 메달의 도금이 벗겨졌다. 가짜였다. 선수들은 분노했다. 메달을 반납하고 진짜 금메달을 요구했다.
금은방 주인까지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는 “도금값밖에 안 되는 돈을 받아 어쩔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누군가 금값을 빼돌렸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축구협회는 선수들에게 “나중에 돈이 생기면 진짜 금메달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제2회 아시안컵 우승 멤버였던 축구 원로 박경화 선생(79)이 쓴 ‘한국 축구 100년 비사’에 나오는 얘기다.
물론 그 뒤로도 협회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우리의 아시안컵 정상 도전은 번번이 실패했고, 저주는 더 확산됐다. 4년 전 아시안컵에서 다 잡은 우승을 놓치자, 박경화 선생 등 원로들이 협회로 달려가 약속 이행을 촉구했다. 협회는 그제야 진짜 금으로 된 메달 23개를 만들었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생존해 있는 선수는 거의 없었고, 연락이 닿은 유족도 일부였다. 그동안 전달한 게 6개에 불과했다. 긴급한 사안이 아니라는 이유로 협회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4일에 3개를 더 전달한다고 하지만, 상당수 메달은 아직도 협회 금고 속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86년 만에 소멸된 밤비노의 저주나, 108년 만에 깨진 염소의 저주나, 그 발단은 사람에 대한 소홀함이었다. 그리고 그 저주가 주는 교훈 역시 인간에 대한 적절한 예의였다. 협회는 단순히 아시안컵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로 축구 영웅들에 대한 정당한 예우 차원에서 이 일을 처리했어야 했다.
스토리텔링 전략도 아쉽다. 메이저리그가 보여줬듯, 저주는 팬심을 움직이는 강력한 마케팅 소재이다. 협회가 성심성의껏 한을 풀어주고, 그 사연들이 하나의 스토리로 제시됐다면 국민들도 크게 지지했을 것이다. 왜 우리 국민들이 우리 대표팀이 아닌,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팀에 열광했을까. 거기엔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가 있었다.
박경화 선생은 파울루 벤투 감독이 아시안컵 저주를 깨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59년의 사연이 응축돼 있는 아시안컵. 극적인 우승으로 수많은 감동이 한꺼번에 전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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