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가 당대 정치적 반대파였던 노론 계열의 호론 벽파의 수장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밀찰(密札·비밀편지) 9통이 새로 확인됐다. 이 편지에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공식 사료에는 기록되지 않은 기밀이 담겨 있어 정조의 통치 체제를 이해하는 새로운 자료로 평가받는다. 앞서 2009년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밀찰 297통이 발견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1923호(정조어찰첩)로 지정된 바 있다.
정조의 밀찰을 소장 중이던 심환지의 후손 청송 심씨 문중에서 최근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에게 편지 분석을 의뢰해 존재가 알려졌다. 안 교수는 정조의 비밀편지를 분석한 논문 ‘정조대 군신의 비밀편지 교환과 기밀의 정치운영’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학술지 ‘정신문화연구’에 실을 예정이다.
○ 밀찰 보안에 극도로 예민했던 정조
“김매순처럼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나는 자가 감히 선현(송시열)을 모욕해 붓끝에 올리기까지 하니, 제멋대로 내버려 둔다면 조정에 어른이 있다고 하겠는가?”
1799년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한 편지에는 분노로 가득 찬 감정이 그대로 실려 있다. 당시 조정에서는 호론의 지도자였던 한원진(1682∼1751)을 이조판서로 추증(追贈·사후에 직급을 높임)하는 안건으로 호론과 낙론이 팽팽한 논쟁을 펼치고 있었다. 정조는 낙론을 이끌던 김조순(1765∼1832)을 통해 반대 여론을 가라앉히는 등 중재에 나섰다. 그런데 스물네 살의 신진 관료였던 김매순이 상소문을 써 낙론의 반발 심리를 부추기자 이에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은 기존에 알려진 정조의 정치적 성향과 다른 모습이어서 주목된다. 18세기 조선의 유학계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색채를 보인 낙론 계열과 정통 성리학 체계를 고수한 호론으로 분화됐는데 정조의 정치적 성향은 낙론에 가깝다고 여겨져 왔다. 안 교수는 “정조실록 등 공식 기록에서는 정조가 호락논쟁에 중립을 지켰다고 나와 있지만 감정의 민낯을 보여주는 밀찰에서는 오히려 호론에 동조한 모습”이라며 “‘만류할 때는 반드시 경의 뜻이라 말하고,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등 자신의 언급이 공개되면 파장이 클 것으로 정조도 예상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밀찰의 성격상 정조는 보안을 극도로 중시했다.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겸종(겸從·잡일을 하거나 시중 드는 사람) 가운데 잡류가 많다고 들었으니 솎아낼 방도를 생각해 더욱 치밀하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 만기친람형 정조의 통치술
“정약용은 문벌과 글재능은 합당하지만 외조부의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을 때 일언반구도 애통해하며 만류한 일이 없습니다. 여론은 모두 그를 사학(邪學)에 물들었다고 하니 청요직에 선발해서는 안 됩니다.”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밀찰과 함께 이번에 새롭게 연구된 박종악(1735∼1795)이 정조에게 보낸 비밀편지 내용의 일부다. 노론 출신으로 1792년 우의정을 지낸 박종악이 다산 정약용(1762∼1836)에 대한 인사정보를 보고한 것이다. 당시에 고위관료로 진출하는 발판인 홍문관 관원의 선정 문제로 노론과 남인, 소론 계열 간에 팽팽한 기 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정조는 이 같은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인 계열인 정약용을 홍문관에 등용시켜 이후 정국을 급속히 냉랭하게 만들었다.
안 교수는 “신진 관료에 대한 인사 추천권은 국왕이 아닌 관료들의 협의로 진행한다는 법적 절차가 있었지만 정조는 소소한 국정에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 했다”며 “정조의 밀찰은 노련하게 책략을 구사한 소통 방법이었지만 과도한 비밀주의에 의존한 정치 형태라는 점에서 비판의 소지 역시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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