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김정은 신년사의 핵심은 ‘나’를 주어로 한 세 문장에 담겨 있다. 약간 줄이면 이렇다. “나는 미국과도 쌍방의 노력에 의해 좋은 결과가 꼭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나는 지난해 6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나 문제 해결의 빠른 방도에 대해 인식을 같이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앞으로도 언제든 또다시 마주 앉아 반드시 국제사회가 환영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서 받았다는 ‘멋진 친서’는 더 절절할지 모르지만 그 내용이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김정은은 “완전한 비핵화로 가려는 것은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의 불변한 입장이며 나의 확고한 의지”라면서 자신의 ‘진심’을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이어진 문장이 걸리긴 한다. “미국이 우리 인내심을 오판하면서 일방적으로 강요하려 들고 제재와 압박으로 나간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득불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난데없이 ‘새로운 길’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명백한 경고겠지만, 주어는 ‘우리’로 바뀌었고 표현도 매우 조심스럽다.
북한 매체는 이 대목을 ‘We may be compelled to find a new way’라고 번역했다. ‘다른 길을 찾도록 강요당하지 않게 해 달라’는 완곡한 어투다. 지난해 5월 트럼프를 화나게 해 정상회담 취소 소동까지 낳은 ‘조미 수뇌회담에 응하겠는가를 재고려할 수밖에 없다(We cannot but reconsider)’는 경고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김정은이 2013년부터 매년 내놓은 육성 신년사의 주어는 늘 ‘우리’였다. ‘나’는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하길 축복합니다”처럼 인민이나 군대에 보내는 격려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변화가 나타난 것은 재작년이다.
김정은은 말미에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인민을 어떻게 더 높이 떠받들 수 있겠는가 하는 근심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한 해를 보냈는데…”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나는 인민의 참된 충복, 충실한 심부름꾼이 될 것을 엄숙히 맹약하는 바입니다.” 비록 악어의 눈물일지언정 ‘수령 무오류’의 독재체제에선 파격이었다.
작년에는 평창 겨울올림픽의 성공을 거론하면서 남북관계에 ‘나’를 내세웠다. “나는 올해에 북과 남에서 모든 일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올해, 김정은은 대미관계에 ‘나’를 앞세웠다.
김정은의 언어는 교묘하다. 이번 트럼프를 향한 ‘나’의 메시지엔 치명적 유혹이 숨겨져 있다. 북-미 협상을 어렵게 하는 참모진에 휘둘리지 말고 우리끼리 담판 짓자며 트럼프를 충동질한다. 옛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도 그랬다.
1988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 막바지에 고르바초프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평화공존(peaceful coexistence)’에 관한 문구를 공동성명에 끼워 넣자며 집요하게 몰아붙였다. 레이건이 “참모들과 협의해 보겠다”고 하는데도, 고르바초프는 “간단한 문구 하나 혼자 결정하지 못하느냐. 참모들은 치우고 우리끼리 얘기하자”고 다그쳤다.
옥신각신 험악한 분위기에서 콜린 파월 국가안보보좌관이 테이블 아래로 레이건에게 쪽지를 건넸고, 레이건은 회의장 한쪽에 참모들을 모아 협의한 뒤 “내 대답은 노(no)다”라고 분명히 했다. 그제야 고르바초프도 단념하고 레이건을 기자회견장으로 안내했다. 파월이 건넨 메모는 이랬다. “그건 앞으론 그들을 비판하지 않겠다고 동의하는 겁니다.”
트럼프라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까. 참모들의 완강한 반대도 귓등으로 흘린다는 트럼프라서 드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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