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드라마에선 상속자면 무조건 회장 취임
실무 경험·능력 검증 없이 기업 경영 나서
공기업 CEO도 정권 바뀔 때마다 낙하산
日 드라마에서 기업 경영은 ‘극한 직업’
한류 붐이 예전만 못하다지만 여전히 일본 TV에서는 심심치 않게 한국 드라마가 방영된다. ‘동이’가 낳은 아들이 ‘영조’고 영조의 손자가 ‘이산’임을 아는, 한국 역사에 밝은 한 일본인 친구와 드라마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에서 제일 쉬운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는데, 정답은 ‘기업 경영’이었다. 그중에서도 재벌그룹을 경영하는 일은 더 쉽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야말로 빵 터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입맛이 씁쓸해졌다.
몇 해 전 방영된 ‘용팔이’라는 드라마는 한국에서 기업 경영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다. 주인공은 경영권을 장악하려는 이복 오빠의 음모로 중환자실에 갇혀 지내다 간신히 탈출해 경영권을 되찾는다. 수년간 침상에 누워 있던 병약한 몸이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회장 취임에 반대하지 않은 이유는 단지 대주주여서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선대 회장의 피가 흐르는 유일한 상속자였기 때문이다. 기업 경영은 고사하고 실무에 참여한 경험도 없는 주인공은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놀라운 기지와 담력으로 경쟁 기업과의 두뇌 싸움을 진두지휘한다. 식물인간처럼 지내던 사람이 어느 날 문득 걷기 시작했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셈이다.
이 같은 판타지는 한국 드라마에서 식상할 정도로 빈번하게 소비된다. 한류 팬들에게는 아들의 애인에게 물을 끼얹는 청담동 엄마보다 더 친숙한 ‘클리셰’(예술 작품에서 흔히 쓰이는 소재)가 아닐까 싶다. 그나마 용팔이가 남달랐던 것은 재벌 후계자가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는 점 정도다.
한국 드라마의 또 다른 흔한 설정은 허랑방탕한 재벌 2세가 가난하지만 인성과 능력을 제대로 갖춘 여주인공을 만나 개과천선한 후, 선하고 능력 있는 경영인으로 거듭나도록 하는 것이다. 남주인공은 경영 초보임에도 불구하고 경영권을 빼앗아 가려는 전문 경영인의 음모를 물리치고 위기에 빠진 회사를 살려내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기업을 경영하는 일이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하는 것보다 더 쉽다. 단, 선대 회장의 피붙이라는 정통성이 있을 때만 그러하다.
이는 기업 경영이나 경영자를 보는 한국인의 인식이 은연중 드라마에 반영됐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30대 재벌 대부분은 경영권을 가족에게 승계한다. 그 정도 규모의 ‘상장’ 기업 대부분이 경영권을 오직 선대 회장의 자녀에게만 승계하는 선진국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 궁금하다. 선대 회장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경영권을 물려받아도 될 만큼 기업 경영이 쉬운 일인가.
이 같은 문제의식은 재벌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의 공기업과 민영화된 과거의 공기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낙하산 인사의 구설에 휘말린다. 경영 실적은 고사하고 전문성도 갖추지 못한 인사들이 경영진으로 내려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쯤 되면 기업 경영이 한국에서 제일 쉬운 일처럼 느껴진다.
한편 일본 TV에서는 중소기업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재벌 판타지보다 더 자주 방영된다. 평범한 직장인이 부모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가업을 잇게 되면서 겪는 고초나, 지방 중소기업 사장이 글로벌 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품질의 운동화를 개발하기 위해 벌이는 분투 등을 다룬다.
현실의 일본 중소기업 창업주들은 기업 규모가 커지고 상장까지 하게 되면 자녀에게 주식을 상속할 뿐 경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완전히 맡기는 경우가 많다.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책무이고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세븐일레븐을 지금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스즈키 도시후미(鈴木敏文) 회장이나, 종업원 340명의 중소 상사를 10여 년 만에 종업원 1만여 명의 미스미그룹으로 키운 사에구사 다다시(三枝匡) 회장은 모두 전문 경영인이다. 최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두 사람의 뒤를 이은 이들도 전문 경영인이다. 기업 경영을 쉽게 보는 한국과 어렵게 보는 일본, 10년 뒤 세계 시장에서는 누가 웃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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