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조직개편에 나선 기업들의 단골 키워드로 애자일과 조직문화 개선이 주목받고 있다. 애자일은 정보기술(IT) 기업처럼 실무 중심으로 빠르게 의사결정을 하고, 부서 간 장벽 없이 유연하게 조직을 꾸려 나가는 체계를 말한다. 에너지, 자동차 부품, 금융, 유통 등 업종과 관계없이 IT 기업 특유의 빠른 혁신을 닮기 위한 특단의 대책으로 조직혁신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7일 재계 관계자는 “요즘 주요 그룹 최고경영자(CEO)끼리 만나면 ‘애자일’이나 ‘일하는 방식’ 변화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유행일 정도”라며 “산업화 시대의 관료적인 조직을 어떻게든 혁신적 조직으로 바꿔야 한다는 고민이 깊다”고 말했다.
○ 조직 변화에 몸부림
실제로 올해 신년사에는 조직혁신에 대한 그룹 총수들의 고민이 묻어났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은 첫 신년사에서 이례적으로 조직문화 개선에 대해 상당한 부분을 할애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비효율적인 업무는 과감하게 제거해 보다 가치 있는 업무에 임직원의 시간과 역량을 집중하는 스마트한 업무 방식을 일상화하고, 리더들이 솔선수범해 변화와 혁신의 의지를 실행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앞서 정 수석부회장은 “현대차를 IT 기업보다 더 IT 기업 같은 회사로 만들겠다” 강조해왔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신년사에서 “‘성공’보다 ‘빠른 실패(fast failure)’를 독려하는 조직이 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은 ‘일하는 방식의 고도화’를 앞세웠고,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은 ‘내부 변화’와 ‘애자일’을 강조했다.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 김대철 HDC현대산업개발 사장, 김형진 신한금융투자 사장도 새해 신년사에서 기민한 조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계에 조직 변화 바람이 부는 것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국내외 산업 환경에서 연간 단위 계획으로 이뤄져온 과거의 업무 형태나 조직으로는 혁신이 불가능하다는 우려 때문이다. 특히 4차 산업혁명으로 ‘업(業)’의 재정의가 필요한 전통 제조 및 금융기업들은 구글 아마존 같은 빠른 의사결정 체계, 유연한 조직문화를 도입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실제로 자동차 부품사 만도를 계열사로 두고 있는 한라그룹은 지난해 말 2019년 인사 및 조직개편에서 ‘애자일하고 빠른 조직’을 만들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만도는 마케팅, 영업, 기술 등 기능 중심의 부서 체계를 브레이크, 스티어링, 서스펜션 등 주요 제품별 책임경영 조직체계로 바꿨다. 제품 중심으로 기능별 조직이 헤쳐 모인 셈이다. SK그룹도 지난해 SK브로드밴드에 이어 올해 SK이노베이션까지 애자일 조직을 확대하기로 했다. 디지털 전환이 한창인 금융업계는 지난해 KB금융, 신한금융, 하나금융, 현대카드 등이 주도적으로 애자일 조직 개편을 발표한 바 있다.
강혜진 맥킨지 한국사무소 파트너는 “기업의 신속한 대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화두가 되고 있다”며 “사업적으로는 고객 및 외부 지향성을 강화하며 대응 속도를 높이고, 내부적으로는 좀 더 효율적이고 몰입도가 높은 조직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꼰대 주의’ 분위기 확산
주요 그룹 CEO들은 빠른 조직과 함께 ‘창의적인 조직’도 주문하고 있다. 윤종규 KB금융 회장은 신년사에서 “디지털 문화에서는 소통이 중요하다.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입사원이든 중간관리자든 무엇이든 말하고 소통해야 집단지성을 통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본 것이다. 주요 기업들이 호칭 파괴, 캐주얼 복장 도입을 유도하는 것도 소통 문화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으로 꼽힌다.
IT 기업식 자유로운 조직문화가 ‘롤 모델’로 떠오르면서 임원들 사이에서는 ‘꼰대 주의보’도 돌고 있다. 꼰대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토론회 형식의 독특한 시무식에서 “임원부터 꼰대가 되지 말고 희생해야 행복한 공동체가 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요즘은 권위를 앞세운 불통의 리더십으로 보일까 봐 오히려 직원들 눈치를 볼 때도 있다”며 “최근 내부 직원들의 불만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외부에 노출되며 기업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례도 적지 않아 말조심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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