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반드시 가야 한다”는 그 길은 어디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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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논설실장
이기홍 논설실장
문재인 대통령은 2일 신년사, 8일 청와대 개편 등을 통해 경제정책 등 국정 방향 전환은 없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특히 “우리 경제를 바꾸는 이 길은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라는 발언은 대통령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길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목표로 하는 경제모델이 어떤 것인지는 설명이 없다. 문 대통령은 ‘함께 잘 사는 길’ ‘경제성장의 혜택을 온 국민이 함께 누리는 경제’ 등이라 했지만 이는 보수정권들도 수없이 했던 말이다.

최저임금 급속 인상, 복지·분배 재정 확대, 보유세 등 증세, 재벌 개혁, 친 노조·시민단체 정책 등 뚜렷한 이념적 색채를 드러내는 정책 방향에 대해 비판론자들은 남미화, 남유럽화로 가는 것 아니냐고 우려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방향을 밟게 될 것이라는 우려와 그걸 목표로 하고 있다는 진단은 엄연히 다르다. 비록 여권 내에 장기집권을 위해서는 노조 등 핵심지지 기반의 이익과 충돌할 혁신이나 규제개혁은 안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지만, 그렇다해서 지향하는 목표 자체가 포퓰리즘은 아닐 것이다.

필자가 만나본 여권 인사들은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복지국가를 염두에 두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사실 진보 성향 정치인들 가운데 자기 나라를 북유럽처럼 고소득과 복지를 함께 누리는 나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정치인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모델로 가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조건에 있느냐다. 산업연구원이 발간한 보고서와 유럽 경제 전문가, 외교관의 의견을 종합해봤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스웨덴이 복지국가를 실현했을 때와 지금 한국의 여건은 너무 다르다는 의견이 많다. 스웨덴은 이미 19세기부터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제지 제철 등 산업을 발전시켰으며 2차 세계대전 후에는 항공기 자동차 등에서 세계 수준의 공업화를 이뤘다. 그런 최고 수준의 경제적 토대를 바탕으로 복지국가가 가능했다.

스웨덴이 복지에 재정을 투입했던 수십 년 전만해도 기업의 기술력이 세계 일류 수준에 올라서면 안정적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초일류 기업이라도 순식간에 망할 수 있는 글로벌 경쟁시대다.

스웨덴의 노사정 합의 시스템은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2017년에 인구 1000만 명을 넘어선 스웨덴과 한국은 경제규모가 다르다. 엄격하고 성실한 근로윤리, 사회적 타협의 전통과 문화, 엄정한 교육·평가 시스템, 정치권의 도덕성 등에서도 차이는 있다. 그랬던 스웨덴도 과도한 복지 재원과 근로의욕 저하로 1990년대 들어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등 극심한 진통을 겪기도 했다.

복지국가의 주된 재원은 기업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선 기업들이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윤을 내야한다. 스웨덴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기업을 지원한다. 각종 조세감면 정책, 대주주 소유 주식 차등 의결권 제도 등 대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도 많다. 그런데 정작 스웨덴의 복지를 부러워하는 한국 좌파의 대기업에 대한 태도는 정반대다. 대기업의 혁신과 투자를 지원하기는 커녕 자꾸 밖으로 쫓아내려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스웨덴 모델은 언젠가 우리 경제가 안정적인 선진국 대열에 올랐을 때 지향할 수는 있어도, 현 수준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모델이라는 의견이 많다.

막다른 골목일 거라는 느낌이 들면 속도를 줄이고 돌아 나오는 게 상식인데 경제를 이념, 선악의 틀로 보는 이들은 골목 끝까지 질주하려는 속성을 지닌다. ‘비도덕적 동기로 움직이고 있음이 분명’한 반대집단의 판단이 옳았음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막다른 길임을 시사하는 표지판이 나타나도 ‘가짜뉴스’ ‘거짓 프레임’으로 치부해버린다.

경제를 정치적 잣대로 보는 시각은 “촛불은 더 많이 함께할 때까지 인내하고 성숙한 문화로 세상을 바꿨다. 같은 방법으로 경제를 바꿔나가야 한다. 더 많은 국민이 공감할 때까지 인내할 것”이라는 대통령의 발언에서도 엿보인다. 시위는 참여자 수가 성공과 명분 당위성을 좌우하는 중요 요소지만 경제정책도 지지 여론이 성패를 가름할 수 있다는 발상은 놀랍다. 남미를 빈곤의 악순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경제정책들도 대부분 압도적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었다. 정치는 표의 많고 적음으로 결론나지만, 경제는 철저히 결과물이 방향의 옳고 그름을 말해준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문재인 대통령#청와대 개편#경제정책#최저임금 인상#재벌 개혁#복지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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