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전 8시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아파트. 6층 입주민 A 씨와 가족 2명이 황급히 집을 빠져나왔다. 베란다에 널어둔 매트리스에서 불길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이날 새벽 전기장판 과열로 한 차례 불이 붙었던 매트리스였다. A 씨가 물을 부어 불을 껐지만 불씨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당황한 A 씨 가족은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현관문을 열어둔 채였다.
잠시 후 화재 경보가 울렸다. 이를 들은 8층 입주민 B 씨(88) 가족들은 복도로 나왔다. 하지만 연기를 들이마시고 쓰러졌다. A 씨가 대피하면서 열어둔 현관문으로 연기와 유독가스가 밀려나와 두 층 위 복도까지 자욱하게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B 씨와 아내, 두 딸, 손자는 기도에 심한 화상을 입고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아파트를 비롯한 다세대주택 화재 때 최초로 불이 난 집 거주자들이 현관문을 열어둔 채로 대피하는 사례가 잦다. 현관문을 닫지 않고 대피하면 연기와 불길이 순식간에 위층으로 번져 올라 피해를 키울 수 있다.
○ 내가 열어둔 현관문, 이웃에겐 지옥문
현관문을 열어두고 대피하면 이웃들의 대피로가 연기와 불길에 막히게 된다. 건축법 시행령상 16층 미만 아파트에는 계단 방화문(防火門)을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 상당수 아파트에 계단 방화문이 없는 이유다. 계단 방화문이 따로 없는 아파트의 경우 가구별 현관문이 방화문 역할을 대신하는데 화재 대피 때 현관문을 열어두게 되면 연기가 순식간에 위층으로 퍼진다.
6일 불이 난 삼성동 아파트 역시 9층 높이여서 계단 방화문이 없었다. 이 때문에 불이 난 집에서 현관문을 열어두고 대피하자 삽시간에 복도와 계단으로 연기가 퍼져나갔다. 이날 불길은 최초 발화 지점인 A 씨 집 밖으로 옮아 붙지 않았지만 현관문으로 나온 연기를 이웃 주민들이 들이마시면서 피해가 커졌다. 화재로 인한 중상자 5명 모두 대피하려다 복도에서 구조됐다.
지난해 11월 7명의 목숨을 앗아간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화재 때도 불이 처음 난 곳인 301호 거주자가 방문을 열어두고 대피해 인명 피해를 키웠다. 유일한 탈출구였던 고시원 출입문에 불길이 옮아 붙으면서 연기가 퍼져 나갔고 미처 탈출하지 못한 고시원 거주자들이 숨졌다. 지난해 6월 서울 강북의 한 다세대주택에서도 화재가 난 집 거주자가 현관문을 열어뒀고 불길이 위층으로 옮아 붙어 80대 남성이 숨졌다. 2015년에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아파트 1층에서 불이 나자 집주인이 현관문을 열어놓고 대피하면서 고층 주민 15명이 고립되는 일도 있었다.
○ 도어스토퍼, 화재 피해 키울 수도
현관문을 닫히지 않게 고정해 두는 도어스토퍼(일명 노루발)를 설치하는 것이 화재 피해를 키울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건축물의 피난·방화구조 등의 기준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방화문은 항상 닫혀 있거나 연기, 온도 등을 감지해 자동으로 닫혀야 한다. 그런데 방화문 역할을 대신하는 현관문에 도어스토퍼를 설치해 두면 불이 났을 때 문이 저절로 닫히지 않을 수도 있다. 삼성동 아파트처럼 현관문이 방화문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라면 도어스토퍼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방청 관계자는 “현관문이 방화문 역할을 하는 아파트라면 도어스토퍼 설치는 불법이다”라고 말했다.
소방 전문가들은 반복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제진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일본은 지방자치단체 산하 방재센터에서 화재 대피 훈련을 주기적으로 하고 있다”며 “불이 나면 사람이 패닉 상태에 빠져 현관문을 열고 대피하는 일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학교와 지자체에서 반복적으로 교육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재성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안전교육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이 났을 때 저절로 닫힐 수 있도록 방화문에 도어스토퍼를 설치하지 못하게 점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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