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석희 미투’를 신호탄으로 체육계에 만연한 성폭력 실상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대한체육회 실태조사 결과, 지난해 성폭력 피해가 136건으로 집계됐다. 여준형 젊은빙상인연대 대표는 그제 “빙상계 성폭력 의혹이 5∼6건 더 있고, 이 중 2건은 피해자가 성추행 의혹을 직접 확인했다”고 밝혔다. 겨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도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만큼 심각한 폭력의 사슬이라면 무명 선수나 어린 선수들은 얼마나 시달렸을지 충격을 금할 수 없다.
정작 선수들을 보호해야 할 종목별 경기단체,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는 사실상 직무를 유기해왔다. 2016년 2월 성추행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쇼트트랙 실업팀 감독 A 씨를 징계하고자 열린 대한체육회 선수위원회 속기록을 보면 기가 찰 따름이다. “내 동생이, 내 오빠가 그 지도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달라” “코치나 감독이나 (지도를 위해) 선수들 어깨 정도는 다 터치를 한다”며 영구제명이 아닌 자격정지 3년으로 징계를 낮췄다.
이렇듯 솜방망이 징계를 하거나 은폐하기 급급하니 대한체육회가 운영하는 클린스포츠센터에 접수된 성폭력 신고는 지난 1년간 단 1건에 그쳤다. 문체부도 책임이 크다. 지난해 대한체육회 감사에서 폭력·성폭력 제보를 묵살한 사실을 적발하고도 징계 요구만 하고 추가 조치는 없었다. 그동안 체육계 성폭력 피해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하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체육계는 폭력이 용인되기 십상인 구조다. 지도자가 선수를 발탁해 키우는 도제(徒弟)식 교육이고, 종목마다 선후배로 촘촘히 엮여 폐쇄성을 갖는다. 지도자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면 선수 생활을 장담할 수 없다. 성적지상주의도 뿌리 깊다. 지도자와 선수, 학부모 간 폭력이 있더라도 성적만 좋으면 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이뤄진다. 합숙훈련, 전지훈련같이 외부와 차단된 채 훈련이 이뤄져 폭력에 무방비로 내몰리는 것도 문제다. 문체부는 뒤늦게 성폭력 전수조사를 하고 영구제명 범위를 확대하겠다며 대증요법을 내놓았다. 이제라도 경기단체 구성과 훈련 환경을 개방적인 구조로 바꿔야 한다. 체육계 내부의 각성과 자정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타까운 희생자가 언제든지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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