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전 9시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 인도는 ‘폴리스라인’으로 출입통제구역이 됐다. 전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검찰 ‘포토라인’ 대신 대법원 청사를 배경으로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기로 결정한 뒤 경찰이 집회 신고자들의 접근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이 대법원 정문 앞에 도착한 승용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를 향해 쏟아지는 “양승태를 구속하라” “검찰 포토라인으로 가라”는 외침은 막지 못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착잡한 표정으로 약 5분간 대국민 성명을 발표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했다.
○ “모든 책임 제가 진다”면서 재판 개입 전면 부인
42년 동안 법관을 지낸 양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장과 대법관,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로서 대법원에서만 약 20년 동안 근무했다. 검찰 ‘포토라인’을 거부하고 대법원 청사 앞 기자회견을 강행한 배경에 대해 양 전 대법원장은 “전 인생을 법원에서 근무한 사람으로서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법원에 한번 들렀다가 가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양 전 대법원장은 “이 모든 것이 제 부덕의 소치로 인한 것이니 그에 대한 책임은 모두 제가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직 사법부 수장으로서 도의적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은 “변함없는 사실”이라며 재판 개입을 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7개월 전인 지난해 6월 초 경기 성남시 분당구 자택 인근 기자회견에서 “재판을 흥정거리로 삼아서 거래를 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던 것과 입장이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또 “이 사건에 관련된 여러 법관들이 각자의 직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법과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해 법조계에선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의 핵심 범죄 혐의로 지목한 직권남용죄가 법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을 향해 “오해가 있으면 이를 풀 수 있도록 충분히 설명하겠다. 편견이나 선입견 없는 공정한 시각에서 이 사건이 소명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해’, ‘편견’, ‘선입견’ 등 단어를 써가며 “검찰 수사가 불공정하다”는 뉘앙스로 깎아내린 것이다.
○ “기억 안 나”, “실무진이 한 일” 혐의 부인
기자회견 뒤 서울중앙지검에 도착한 양 전 대법원장은 특별수사팀장인 한동훈 3차장검사와 티타임을 갖고 조사 절차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오전 9시 반부터 특별조사실인 1522호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사 과정은 양 전 대법원장의 요청대로 영상 녹화됐다. 수사 검사는 예우 차원에서 ‘원장님’이라는 호칭을 썼고, 조사 도중에 휴식 시간을 가진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이날 양 전 대법원장의 재판 개입 및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40여 가지 의혹 중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개입한 의혹부터 추궁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피고 측인 일본 전범기업의 변호사를 집무실 등에서 만나 전원합의체 회부 계획을 누설했다는 의혹에 대해 만남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인 대화 내용은 기억이 안 난다”는 취지로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상고법원 도입 등 자신의 사법정책에 반대한 진보 성향 법관들을 뒷조사해 인사 불이익을 줬다는 의혹에 대해 “실무진이 알아서 한 일”이라는 취지로 부인했다고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