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27화>서간도-부민단
중국 지린(吉林)성 퉁화(通化)시 류허(柳河)현에 들어서면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수양버들이 거리 양쪽에 줄지어 서 있다. ‘버들강’이라는 현(縣) 이름을 상징하는 이곳 버드나무엔 우리나라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한(恨)이 배어 있다. 이 지역 조선족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시절 만주까지 침탈한 일본 군경은 독립지사들의 목을 베고, 그 머리를 류허현 삼원포(三源浦)의 강변 버드나무에 매달았다.
일제의 잔악한 행위는 류허현의 조선족 학교에서도 찾을 수 있다. 1912년에 설립돼 올해로 개교 107주년을 맞는 류허현 삼원포의 조선족실험소학교(현 조선족완전중학교)의 약사(略史)는 이렇게 전한다.
‘(조선족실험소학교의 전신인) 은양학교는 1920년 11월 5일 일제의 ‘경신 대토벌’ 때 배일(排日)교육을 했다는 죄명으로 강제 폐교되었고 교장 방기전은 일제의 군도에 의해 몸이 네 동강 나 순국하였다. 은양학교 선생으로 있던 안동식 장로의 두 아들도 일제의 군도에 잘려 몸이 세 동강 나 순국하였으며, 나이 많은 안동식은 자기 손으로 판 무덤에 산 채로 매장됐다. 일송 김동삼의 동생이자 삼광학교 교장 김동만은 두 손을 꽁꽁 묶인 채 일제의 군마에 의해 10여 리 끌려간 뒤 군도에 잘려 순국하였다.’
일제로부터 3·1운동과 항일투쟁의 온상지로 지목된 은양학교는 폐교됐다가 1922년 동명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이후 동명학교의 맥을 이어받은 조선족완전중학교에서는 아쉽게도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학교 관계자는 “갈수록 조선족 학생 수가 줄어들어 다른 학교와 통합됐고, 학교 위치도 원래 터에서 바뀌었다”고 전했다.
○ 서간도 은양학교, 북간도 명동학교
압록강 건너편의 서간도 삼원포 추가가(鄒家街)에 처음 둥지를 튼 은양학교는 그 시절 본국에서 유학생이 몰려올 정도로 유명한 민족학교였다. 두만강 대안(對岸) 북간도 룽징(龍井)의 명문 명동학교와 비교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에서도 은양학교와 명동학교 학생들은 이심전심으로 행동을 같이했다. 명동학교 학생들이 룽징에서 3·13만세운동(본보 제23화 참조)을 주도하던 때에 맞추어 은양학교 학생들은 삼원포에서 하루 앞선 3월 12일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만세운동은 삼원포 외곽에서 독립선언 경축대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됐다. 이 모임에는 은양학교 교사와 학생, 삼원포 교회 교도, 서간도 한인들의 독립운동조직인 부민단 간부 등 수백 명이 참석했다. 이때 서간도 한인사회 부녀자들이 조직한 부인회의 박혜숙 회장이 “최후 1인까지 최후 순간까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자”는 혈서를 보내와 대회장을 숙연케 했다.
삼원포 서문 밖에서 축하회를 마친 군중은 운동 지휘부의 인솔에 따라 저마다 태극기를 들고 “나의 강산을 돌려 달라” “일제는 어서 물러나라”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강을 건너 삼원포 시내로 향했다.
일제는 이를 방관하지 않았다. 중국 관헌들을 앞세워 온갖 방해공작을 펼쳤고, 시위 군중을 막기 위해 중국 군경까지 동원했다. 중국 군경은 삼원포 시내로 대규모 군중이 몰려오자 “한인 폭동이 일어났다”며 총을 쐈다. 중국 군경의 사격으로 시위대 중 9명이 쓰러졌다.(‘중국동북지역 한국독립운동사’, ‘서간도 독립군의 개척자, 이상룡의 독립정신’)
이런 참사에도 서간도의 만세 시위는 중단되지 않았다. 3월 17일 다시 삼원포 내 각 민족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1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시위대는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진격해 시위운동을 전개하자는 결의까지 했다. 서간도의 민족운동 지도자 이시영이 이들을 만류했다. “다음의 독립전쟁에 총력을 바치기 위해서 지금의 일시적 기분을 자제하자.”(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
이시영은 총칼로 무장한 일제가 버티고 있는 고국으로 무작정 들어갔다가는 희생만 따를 뿐이니 3·1만세운동의 정성과 열기를 축적해 독립전쟁에 총력을 기울이자고 설득했다. 부민단의 중책을 맡고 있던 이시영의 발언은 서간도 민족운동 지도자들의 방침이기도 했다. 서간도 지도자들 사이에는 혈전(血戰)을 치러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일찌감치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 한민족 자치국의 탄생
서간도 한국인들의 이런 정서는 이 지역 개척사와 무관하지 않다. 서간도 이주민들은 국외에 독립전쟁 기지를 구축하려는 목적으로 압록강을 건너온 국내 명망가들과 그 가족이 주류를 이뤘다. 이들은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은양학교가 자리한 삼원포 추가가 일대를 독립전쟁 전략기지로 지목했다. ‘삼원포는 사면이 산악으로 둘러싸고 있어 자연 성벽을 쌓아 놓은 듯하고, 물이 흐르는 곳이어서 토지도 비옥했기 때문이다.’(동아일보 1920년 8월 21일).
이주자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경성에서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성을 떨치던 이회영 6형제(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가문과 경북 안동의 기개 높은 ‘혁신 유림’인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가문, 선산의 명망가 허위 가문 등이 이곳에 모였다.
삼원포 추가가에 정착한 이들은 1911년 자립 경제와 민족 교육을 목표로 경학사(耕學社) 및 부설기관인 신흥강습소(신흥학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특히 ‘신민흥국(新民興國·백성을 새롭게 하고 나라를 융성하게 일으킴)’의 이념을 따른 신흥강습소는 나중에 무장 독립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무관학교로 바뀐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광복절 축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으로 언급했던 안동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은 칠언(七言) 한시로 ‘추가가의 결사’를 회고했다.
‘추가가에서 결사하니 충심은 굳고/밭 갈고 배우는 일 취지 모두 완전했다/모든 정신 신흥학교에 쏟아부어/양성한 군사 비호(飛虎)보다 날랜 오륙백.’(‘만주기사·滿洲紀事’)
500∼600명의 군사력까지 확보한 경학사는 이후 부민단-한족회-서로군정서 등으로 그 계보를 이어간다. 이 단체는 가문 단위의 끈끈한 단결력과 농업 생산을 통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 지속된 독립운동기지로 활약한다. 일제가 이곳을 ‘서간도 불령선인(不逞鮮人·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핵심 소굴’로 지목해 가혹하게 탄압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한편 서간도의 민족지도자들이 본국에서의 3·1운동 소식을 들은 때는 부민단(1915년 혹은 1916년 결성)을 이끌 때였다. 당시 부민단을 지도한 이상룡은 3·1운동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종국에는 실패할 것이 불 보듯 뻔하나 대의(大義)의 관두(關頭·가장 중요한 지경)에서 어찌 감히 떨쳐 울지 않을쏘냐.”(‘만주기사·滿洲紀事’)
비폭력을 앞세운 평화적 만세운동이 결실을 맺기 어렵겠지만 전 세계에 한국인의 독립 열망과 의지를 밝히겠다는 대의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부민단 지도부는 중국 관헌들을 자극할 수 있는 대규모 대중 집회 대신 서간도 한인사회 곳곳에서 독립운동 열기를 고취하는 소규모 게릴라식 만세운동을 조직했다. 이후 류허현과 퉁화현을 비롯해 환런 판스 지안 싱칭 등 서간도 각 지방에서 부민단 지회 분회 등을 통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부민단은 또 3·1운동을 계기로 잘 훈련된 군대를 동원해 조직적인 국토 수복 작전을 수행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부민단은 1919년 4월 한족회로 발전적 해체를 했다. 군자금과 무기를 확보한 한족회는 산하에 ‘서로군정서’라는 무장단체를 조직했다. 신흥학교 출신 무관들이 서로군정서를 주도했다. 1920년 6월 일본 정규군을 처음으로 대파한 봉오동전투에서도 서로군정서 독립군들은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한족회의 고무적인 활동을 대서특필했다. ‘사면이 청산록수(靑山綠水)로 두른 봉천성 삼원보(삼원포)에서 2000호의 조선 민족이 모여 한족회가 다스리고 있으며 소중학의 교육까지 담당해 완연히 한민족의 자치국을 일구었다.’(1920년 8월 21일)
서간도는 3·1운동이라는 자양분을 토대로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로 우뚝 섰다. 상하이의 임시정부에 버금가는 ‘소국가(小國家)’ 체제도 구축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시초가 된 삼원포 대고산 자락 아래의 경학사와 옥수수 창고를 빌려 개교했다는 추가가의 신흥강습소는 흔적조차 없다. 이곳을 찾았을 때 텅 빈 자리만 남아 있었지만 기자에겐 낯선 타국이나 타향으로 보이지 않았다.
▼ 동북 3성 식문화 바뀌고, 폐교위기 신흥무관학교에 자금 몰려 ▼
안동출신 독립운동가 이상룡-김동삼, 수차례 실패 딛고 만주벌판서 벼농사 성공
“경북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상룡, 김동삼 등이 ‘수전(水田·논) 농사’에 성공하면서 서간도 지역은 무장 독립운동의 중심 기지가 됐다.”
강윤정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만주 독립운동에서 서간도 한국인들의 농업혁명에 주목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당초 서간도에서 중국 농민들은 조, 콩, 감자, 옥수수 등 한전(旱田·밭) 작물만 생산했다. 척박하고 거친 땅에서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 논농사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고삐나 잡고 글만 읽던’ 서간도의 안동 출신 양반들이 수없는 실패를 거듭한 끝에 논농사에 성공했다.
이상룡은 1914년 당시의 감회를 이렇게 기록했다. ‘만주 사람들 논농사 지을 줄 몰라/거친 벌판 빌려 올벼 늦벼 파종했다/가을 되매 흰 쌀밥에 물고기 반찬/그제사 얼굴 볼그레 생기 돌아오다.’(‘만주기사·滿洲紀事’)
논농사 성공의 파급 효과는 컸다. 우선 중국 동북 3성(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의 식문화가 바뀌었다. 옥수수, 감자 등을 주식으로 삼던 만주인들이 영양가 높고 맛있는 수갱자(水粳子·조선 쌀)에 매료됐다. 이후 농업의 주도권은 땅을 가진 중국인이 아니라 기술을 가진 한국인들 손으로 넘어왔다. 한국인들의 정치적 지위는 크게 향상됐다. 중국인들은 경원시하던 한국인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중국 지방 당국은 만주로 넘어오는 한국인을 적극 유치하고 한인촌 지도부에 자치 행정을 위임하며 신뢰를 보냈다.
독립전쟁기지 운영도 활성화됐다. 그동안 명맥만 유지하던 무관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에 자금 지원이 가능해지자 인재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경학사 창설 당시 이회영 일가와 이상룡 일가가 고국에서 가져온 재산으로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1, 2년 만에 문을 닫을 형편까지 몰렸다. 하지만 논농사로 부를 축적한 한국인들이 자치기관인 부민단에 자금을 댔고, 그 덕분에 신흥무관학교는 성장할 수 있었다.
강 부장은 “신흥무관학교는 특정 개인의 재산 출연으로 설립됐지만 이후의 성장과 발전에는 서간도 한국인들이 낸 자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신흥무관학교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된 대한민국 최초의 정식 사관학교로 인정받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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