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 입구에서 객석까지 향하는 좁고 어두컴컴한 길. 전쟁터의 참호처럼 꾸민 통로를 걷다 보면 벙커에 도착한다. 벙커 한가운데에 마련된 무대에 선 배우들은 관객 100명을 향해 “여기에 있는 이 불쌍한 병사들”이라고 외치며 모두가 벙커에서 함께 살아남아야 하는 전우임을 알린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벙커 밖의 적을 조준하던 총구는 어느새 벙커 안에 있는 아군들을 향한다. 이 순간, 관객은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던져진 인간의 비참함, 트라우마, 외로움과 만난다.
내용과 형식의 기발함으로 호평받고 있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는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모르가나’, ‘아가멤논’, ‘맥베스’라는 테마에 맞게 각색된 옴니버스식 3부작이다. 각 테마는 신화와 소설에서 이야기를 가져와 전쟁 속 인간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아가멤논’에서는 독일군 영웅 저격수를 그리스 신화 속 아가멤논 왕에 빗대 아내에 의해 살해당하는 모습을 그린다. ‘맥베스’에서 권력에 도취된 영국 장군이 맥베스로 등장하며, ‘모르가나’에서는 아서왕 전설 속 기사들처럼 전쟁을 흥미로운 모험으로 생각해 참전했다 고통받는 젊은 군인들의 이야기를 표현했다.
벙커는 전쟁에서 최후의 방어선이자 공격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극 중에서 벙커는 거대한 전쟁 시스템에 희생되는 인간들이 아군, 적군마저 분간하지 못한 채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파국을 맞는 공간이다. 결국 벙커는 심리적 방어선일 뿐 전쟁에서는 어떤 곳도 안전지대가 될 수 없다는 걸 말한다.
소품, 음악도 눈여겨볼 만하다. 인간이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잠이 들도록 하는 베개는 역설적으로 상대를 질식시키는 살인 도구가 된다. 전쟁광인 맥베스 장군이 음악을 듣는 장면에서는 나치가 홍보 수단으로 이용한 바그너의 곡이 흘러나온다. 총격 장면에선 1차대전 당시 사용된, 탄피가 한 발 한 발 위로 튀어 오르는 총기 소품을 사용하는 등 철저한 고증도 거쳤다.
무대 음향, 특수효과 역시 몰입을 높인다. 벙커 위로 적 포탄이 떨어질 때면 무대 전체가 진동할 정도로 큰 효과음을 쓴다. 벙커가 울리며 천장에서 흙가루(실제는 초콜릿 가루)가 떨어지는 소소한 특수효과도 사용한다. 다만 과도한 음향 때문에 배우의 대사가 일부 전달되지 않는 점은 아쉽다. 물론 바로 옆 사람의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소란스러운 벙커 내부 모습을 상상한다면 무대에 집중하는 데 큰 문제는 없다. 이석준 박민성 오종혁 박은석 신성민 등 출연. 2월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 소극장. 전석 3만 원. ★★★★(★ 5개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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