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철공소 골목. 슬레이트 지붕의 단층 건물 수백 개가 이어진 골목에선 요란한 기계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소리를 따라 가보니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기계 하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기계엔 뚜껑이 없는 빈 캔이 올려져 있었다. 기계가 작동되자 7초 만에 캔에 뚜껑이 생기며 밀봉이 완료됐다. 이 기계는 수제맥주나 곡류 등을 밀봉할 수 있게 해주는 기계인데 개발에만 1년 6개월이 걸렸다. 이 기계를 개발한 영신정밀산업 대표 백서영 씨(50)는 “서강대 교수님들의 기술적 조언과 투자로 내 상상이 드디어 실현됐다”고 말했다.
○ ‘디지털 광장’ 만나 되살아난 문래동
백 씨는 이 기계를 개발한 뒤 한 업체에 납품했는데 곧바로 반품 요구가 들어왔다. 밀봉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 씨는 “밀봉 기술이 굉장히 어려워 시행착오가 많았다. 포기하고 접을 생각을 했었다”고 했다. 포기하려던 차에 백 씨는 지난해 12월 ‘디지털 광장’이란 것을 알게 됐다.
디지털 광장은 서강대 교내 벤처기업 더봄에스가 개발한 철공장인 소통·협업 플랫폼인데, 문래동 철공장인들이 제작하고 싶어 하는 물건에 대해 기술적 조언과 함께 제작비용 투자까지 해준다고 했다. 백 씨는 이런 사실을 서울소공인협회를 통해 알게 됐다. 백 씨는 디지털 광장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제작비 지원을 신청해 선정됐고 이철수 서강대 기계공학과 교수의 조언을 받아 밀봉기계를 다시 만들었다. 그리고 보름 만에 완성했다. 백 씨 외에도 4명의 신청자가 선정돼 고속버스 창문을 쉽게 깰 수 있는 ‘유리파쇄기’ 등이 제작되기도 했다.
문래동은 디지털 상거래가 일반화되면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50, 60대가 대부분인 문래동 철공장인들은 기술력은 좋았지만 협업하는 방법도, 자신들이 만든 제품을 어디다 팔아야 할지도 잘 알지 못했다. 한재형 서강대 스마트핀테크 연구센터 교수는 “문래동 철공장인들은 소위 ‘스커드 미사일’을 깎을 수 있을 정도의 기술력을 가졌는데도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판매 능력이 점차 떨어지고 있었다”며 “이들에게 디지털이란 옷을 입혀준다면 그 기술력이 계속해서 살아 있을 것이라 생각해 디지털 광장을 개발했다”고 했다.
○ 소통·경영지원·교육 등 전반적 관리
지난해 12월 디지털 광장이 만들어진 뒤로 문래동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자신과 친한 사람이 아니면 소통을 하지 않아 기술 결합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디지털 광장에서 검색을 통해 자신에게 필요한 철공장인을 찾아 쉽게 협업하고 있다. 문래동에서 모터자동화기기 업체를 운영하는 김진학 씨(55)는 “전에는 아는 사람과만 작업을 같이 했는데 지금은 내게 필요한 기술력을 갖춘 여러 철공장인과 작업할 수 있게 돼 좋다”고 웃으며 말했다.
문래동 철공장인들은 서강대 교수진과도 소통하고 있다. 철공장인들은 자신이 만들고 있는 시제품에 기술적 결함이 있으면 디지털 광장에 글을 남긴다. 글을 확인한 서강대 기계공학과 교수들은 철공장인과 일대일 상담을 통해 문제 해결을 도와준다. 영업에 서툰 철공장인들을 위해선 경영학과 교수가 나선다. 철공장인이 새로운 기술력을 갖춘 시제품을 만들면 이를 필요로 할 만한 기업을 소개해주는 방식이다. 디지털 광장은 앞으로 철공장인들이 원·부자재를 공동구매할 때 필요한 결제 프로그램을 추가할 예정이다. 한 교수는 “이 외에도 철공장인들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컴퓨터 설계과정 등을 교육할 예정”이라며 “디지털 광장을 문래동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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