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HP와 애플, 구글, 아마존의 공통점은 모두 실리콘밸리의 작은 ‘차고(車庫·garage)’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만 들고 안정적인 학교와 직장을 박차고 나온 젊은 창업자들이 사무실 비용이라도 아껴 보자는 마음으로 차고에서 사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최근 그 어느 때보다 혁신에 목마른 한국 대기업들도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실리콘밸리의 ‘차고 정신’을 강조하며 사내벤처 육성을 적극 격려하고 있다. 안정적인 조직에 안주하지 말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새로운 사업 분야를 찾고 일자리도 늘리자는 취지다.
재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이 사실상 성장의 한계에 다다르자 1990년대 말 사내벤처로 대기업에서 독립해 성공한 네이버나 인터파크 같은 제2의 벤처 신화를 만들어 보자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며 “중소벤처기업부 등 정부 차원에서 대기업들에 관련 정책을 적극 요구하는 것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17일 경기 이천 본사에서 사내벤처 프로그램인 ‘하이개라지(HiGarage)’ 출범식을 열었다. 지난해 8월 공모를 시작한 이래 하이개라지에는 약 240건의 아이디어가 접수됐다. SK하이닉스는 이들 중 사업 실현 가능성과 사회적 가치 창출 수준을 고려해 ‘테스트 공정용 칠러 장비 국산화’ 등 6건의 아이디어를 사내벤처로 육성하기로 하고 12억 원의 자금을 사업화 과정에 지원하기로 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실제 곧 사업화를 준비 중인 단계라 보안에 신경 쓰고 있다”며 6건 중 2건만 내용을 공개했다.
테스트 공정용 칠러 장비의 국산화를 제안한 SK하이닉스 김형규 기장은 “반도체 공정에서 온도 조절에 사용되는 칠러는 국내 장비업체들이 기술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야 중 하나”라며 “국산화에 성공하면 협력업체에 기술을 지원해 국내 반도체 생태계 강화에 기여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하이개라지 프로그램에 선발된 7명의 직원은 사내벤처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별도 전담 조직으로 이동하게 된다. 근무시간은 자율로 정할 수 있고 인사평가도 상대평가 대신 절대평가 방식으로 받는다. 이들은 앞으로 최대 2년 동안 벤처 창업 전문가들과 준비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창업 혹은 사내 사업화를 선택하게 된다. 회사 관계자는 “기간 내 사업화에 실패하더라도 재입사를 보장한다”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라고 했다.
앞서 삼성전자는 2012년 말부터 사내 벤처 육성프로그램 ‘C랩’을 운영하며 최근까지 총 36개 스타트업을 독립시켰다. 이들은 CES와 IFA, MWC 등 세계 3대 IT전시회에 잇달아 참가해 혁신상을 수상하는 등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삼성전자는 6년간의 운영 노하우를 회사 밖으로 확대하기로 하고 앞으로 5년간 500개의 사내외 스타트업을 키우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LG 계열사도 2016년부터 임직원 아이디어에 개발비를 지원하며 사업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아이디어 피칭’ 대회를 상시 운영 중인 LG CNS는 과장급 직원의 머릿속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지능형 챗봇 서비스를 ‘단비’라는 사내벤처로 설립해 19개월 만인 지난해 8월 분사하는 데 성공했다.
사내벤처 장려 분위기는 전자·IT 업계뿐만이 아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사내벤처 공모전을 통해 ‘플립’ 등 신규 패션 브랜드를 론칭했다. 최근 현대글로비스도 물류, 해운, 유통부문에서 신사업 및 신시장을 발굴하고 사내벤처를 육성하기 위해 ‘신사업 아이디어 공모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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