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마친 신재용, 유용 씨는 서둘러 커피숍을 빠져나갔다. 어둠 속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급히 방송국으로 향했다. 남매는 14일 이른 아침부터 밤 12시가 넘어서까지 끼니도 거른 채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 “(공론화) 기회가 찾아왔을 때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이달 초 쇼트트랙 심석희 선수가 코치였던 조재범 씨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고소한 사실이 드러난 것을 계기로 스포츠 ‘미투’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주 초 유도선수였던 신유용 씨가 고교 시절인 2011년부터 5년 동안 코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고, 다음 날에는 태권도 선수였던 이지혜 씨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5년 동안 지도자로부터 상습적인 폭력과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심석희 선수를 보고 용기를 냈다”고 말한 신유용 씨는 본보와의 인터뷰에 오빠 재용 씨와 함께 나왔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오빠는 지금도 유도 선수로, 동생이 고소한 코치와는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다. “남편의 외도 여부를 확인해 달라”며 지난해 3월 전화를 했던 코치의 아내도 유용 씨를 지도했던 사람이다. 유도를 통해 알고 지낸 ‘선수 남매’와 ‘코치 부부’는 법정에서 재회할 가능성이 높다.
오빠는 이날 ‘그루밍 성폭력’이라는 말을 꺼냈다. 코치가 처음 범죄행위를 저지른 뒤부터 동생을 길들이는 방식으로 대한 것 같다는 얘기였다. 동생은 “코치가 패밀리레스토랑에서 밥을 사주며 ‘예쁘다’고 칭찬한 날이면 모텔로 가자고 했다”고 말했다. 마부(groom)가 말을 손질한다는 뜻의 ‘그루밍’은 ‘길들이기’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뜻한다. 피해자들은 피해 당시 자신이 성범죄의 대상이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지난해 ‘문화계 미투’가 들불처럼 번졌을 때에는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폭행 피해를 털어놓는 과정에서 ‘스승’으로 대했던 사람에 대한 미안함으로 눈물을 흘리는 피해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발생한 은행 강도사건으로부터 유래한 이 용어는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 또는 동조하는 현상을 뜻한다.
아이가 어릴 때 수영을 배우게 한 적이 있다. 그 수영장의 한 코치는 학부모들이 보는데도 거리낌 없이 아이들을 때렸다. 잘 가르친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선수가 되려면 그 코치에게 아이를 맡겨야 했고, 그의 방식에 따라야 했다.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서의 운동을 택한 아이와 그 부모들에게 지도자는 절대 강자다. 엄마, 아빠가 연신 고개를 숙여야 하는 대상을 보며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동생 신 씨는 “평소 무섭기만 했던 코치가 (성폭행 뒤) 잘해 주니 ‘이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하자’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그때의 신유용은 그랬다. 지금 와서 보면 너무 바보 같았다”고 말했다. 오빠는 “그루밍 과정을 겪은 동생이 ‘스톡홀름 증후군’의 인질처럼 코치에게 친근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매가 작정을 하고 언론을 만나러 다닌 날 문재인 대통령은 “철저히 조사, 수사하고 엄중한 처벌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지시했다. 남매는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신유용 씨처럼, 그때 참았다면 이제는 말해야 한다. 지금 당하고 있다면 당장 밝혀야 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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