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반도체 업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주고받지요. 그런데 이걸 업계가 ‘압박’이라고 느낄 정도가 되면 엄청 큰일이 될 겁니다. 부당한 권력 행사니까요.”(반도체 업계 관계자)
18일 오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지라시(사설 정보지) 하나가 빠르게 돌았다. ‘기획재정부가 삼성전자, 하이닉스 관계자들과 미팅을 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지라시에는 ‘반도체 경기 둔화로 수출이 감소할 가능성이 높다. 상대편(정부 비판 세력)에 공격의 빌미가 될 수 있어 정부가 매우 신경 쓰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논란이 된 문구는 ‘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관계자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호출하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정부가 수출 실적을 지탱하기 위해 기업 실무자들을 압박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서다.
지라시의 내용이 사실인지 묻는 기자들의 문의가 쏟아지자 기재부는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기자들에게 단체 문자메시지를 보내 “16일 기재부 1차관 주재로 반도체 업계, 관련 전문가가 만나 간담회를 열었고 기업의 투자 계획이나 수출 전망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해당 업체들과 정부가 ‘단순 간담회’라고 설명하며 소동은 일단락됐지만 정부가 반도체 경기 하강 국면을 얼마나 초조하게 지켜보는지 엿볼 수 있는 해프닝이었다.
관세청에 따르면 이달 10일까지 반도체 수출은 지난해 동기 대비 27% 떨어졌다. 반도체 경기 둔화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되자 기재부 외에 산업통상자원부 역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공장을 방문해 투자 진행 상황 등을 점검하는 등 업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부가 이처럼 반도체에 목을 매는 이유는 반도체 외에는 수출을 지탱할 산업이 딱히 보이지 않아서다. 지난해 반도체 수출 실적은 1267억 달러로 전체 수출의 21%를 차지했다.
전기자동차와 바이오, 첨단 신소재 등 신산업 분야의 수출 실적은 모두 합해야 겨우 100억 달러를 넘기는 수준이다. 아직 세계시장에 통할 만큼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크지 못했다는 증거다. 자동차와 조선 등 소싯적 ‘효자상품’은 수출 경쟁력을 잃고 있지만 정부도 뾰족한 대책이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가 반도체 업계를 쪼아 수출 목표를 채우려 한다는 뒷말이 나온다.
정부는 하반기부터 반도체 업계가 지난해 수준의 실적을 회복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딱히 근거는 없다. 단지 2년 주기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반도체 경기 사이클이 짧아지기를 기대하는 수준이다. 올해 반도체 경기가 예상처럼 하반기에도 회복이 안 될 경우 수출 목표 6000억 달러를 어떻게 맞출지 정부 관계자에게 물었다. 돌아온 답은 “다른 산업에 희망을 걸어봐야죠”였다.
혹여 정부가 당장의 실적 때문에 ‘기업 지원’이 아닌 ‘기업 압박’에 무게를 둔다면 이날 있었던 지라시 해프닝은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정권의 국정 농단을 겪으며 투명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눈높이가 높아져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기업인들을 많이 만나라고 정부에 당부한 건 민관이 ‘2인 3각’으로 뛰라는 뜻이지, 기업인들을 불러서 닦달하라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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