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이따금 인생을 사계절에 빗댄다. 움(새싹)이 터서 자라는 봄, 푸름이 최고조에 달하는 여름, 열매를 맺는 가을, 만물이 얼어붙는 겨울이 삶의 여정을 닮아서다. 그 여정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슬픈 사람들이 있다. 조선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러시아 가수 빅토르 최도 그중 하나다. 그는 1990년,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를 다룬 영화의 제목 ‘레토’(러시아어로 여름)처럼, 그는 영원한 여름을 살고 있다.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에는 그를 추모하는 벽이 있고 사람들은 그가 만든 노래를 부른다.
그의 노래는 절묘한 긴장의 산물이었다. 한편에는 록 음악을 서구의 산물로 간주하고 재갈을 물리는 전체주의의 폭압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록이 대변하는 자유주의 정신이 있었다. 비틀스의 노래처럼 부드럽고 서정적인 그의 노래에서 양자가 다투고 충돌했다.
예를 들어 그의 노래 중 최고봉에 속하는 ‘혈액형’이 그랬다. 그것은 아프가니스탄전쟁(1979∼1989)에 투입되는 군인에 관한 노래였다. “소매 위에는 나의 혈액형/소매 위에는 나의 군번/전투에서 내게 행운을 빌어줘.” 얼핏 들으면 전장에 나가는 씩씩한 군인의 말로 들리지만 그것은 금세 뒤집힌다. “내가 치러야 할 대가지만/그 대가로 어떻게든 이기려는 건 싫어/누군가의 가슴을 짓밟고 싶지는 않아.” 혈액형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도 한몫한다. 군인이 자신의 몸에 혈액형 표시를 지니는 것은 수혈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서다. 이것은 전쟁이 생명을 담보로 한다는 의미다. 이쯤 되면 노래에 깃든 반전(反戰) 메시지는 명확해진다.
이 노래가 발표되었을 때, 소련은 9년째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 중이었다. 젊은이들의 생명이 허비되고 있었다. 전체주의 정권에 환멸을 느낀 젊은이들은 그의 노래에 열광했다. 그는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삶의 동력을 주었다. 그러던 빅토르 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삶의 찬란한 레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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