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손에만 달린 출생신고… 아파도 숨져도 ‘없는 아이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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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출생신고제도 허점에 존재조차 모른채 사라져

지난해 5월 경북 포항의 한 모텔. 모텔 직원 A 씨는 코를 찌르는 듯한 역한 냄새를 맡았다. 냄새를 따라가 보니 202호였다. 수상함을 직감한 A 씨는 경찰에 신고했다. 202호 방 안에서는 바싹 마른 영아 시체가 발견됐다. 숨진 지 여섯 달이나 된 아이였다.

숨진 채 발견된 예은이(가명·여)는 태어난 지 넉 달 만인 2017년 11월 영양실조로 숨졌다. 숨질 당시 예은이는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정도로 말라 있었다. 엄마 유모 씨(26)가 남자친구와 외박을 하고 다니는 동안 예은이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유 씨는 숨진 예은이를 여행용 가방에 담은 뒤 동네 모텔을 전전했다. 유 씨의 출산 사실을 아는 몇몇 지인이 예은이에 대해 묻기는 했지만 적당히 둘러댔다. 모텔 직원이 신고하기 전까지 아무도 예은이의 죽음을 몰랐다. 예은이는 출생 신고가 되지 않아 서류상으로는 태어난 적이 없는 아이였다. 유 씨는 지난해 12월 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로 징역 12년이 확정됐다.

현행 가족관계등록법은 부모(혼외자는 산모가 신고)가 아동 출생 1개월 내에 출생 신고를 하도록 정해 놨다. 이 기한을 넘겨 신고하면 과태료를 물리고 아동 방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처벌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부모가 출생 신고를 하지 않아도 과태료 부과나 형사처벌이 어렵다는 데 있다. 출생 신고 대상인지를 확인할 방법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병원들이 출산 기록을 공공기관에 제공할 의무가 없다. 부모가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도 주민센터에 출생 신고를 하지 않으면 정부는 신생아의 존재를 알 길이 없다. 검사나 지방자치단체장도 출생 신고를 할 수 있게 돼 있지만 아동학대 사건 신고 등으로 아이의 존재가 확인됐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혼외자의 존재를 숨기고 싶어 한 엄마가 일부러 출생 신고를 하지 않은 사례도 있다. 정훈이(가명·6)는 지난해 3월까지 4년 동안 출생 신고가 되지 않은 상태로 살았다. 남편과 별거 중이던 B 씨는 40대 남성을 만나 정훈이를 낳았다. B 씨는 정훈이 출생 신고를 하면 법에 따라 별거 중인 남편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오르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혼 과정에서 남편에게 꼬투리를 잡힐 것을 우려한 것도 B 씨가 출생신고를 꺼린 이유다.

혼외자인 다온이(가명·12)는 엄마가 출생 신고를 하지 않아 10세가 될 때까지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하루 종일 집안에서만 지냈다. 엄마 대신 다온이를 맡아 기르던 외삼촌은 먹을 것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고 TV를 보지 말라면서 허리띠로 여러 차례 때리기도 했다. 출생 기록이 없던 다온이의 존재는 10세가 되던 2016년 아동보호기관에 학대 신고가 접수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다온이 엄마는 아동학대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자 뒤늦게 출생 신고를 했다.

출생 신고가 되지 않은 아이는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취학 연령에 이르러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아도 수사기관이나 자치단체에서 아동학대를 의심한 조치에 나설 수도 없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3월부터 예방접종 기록 등의 빅데이터를 활용해 위험에 처한 아동을 조기에 가려내겠다고 했다. 하지만 출생 신고가 되지 않은 아이들은 예방접종 연령이 지났는지를 알 방법이 없어 도움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다.

교육당국과 경찰은 2016년 계모의 학대로 일곱 살 아이가 숨진 일명 ‘원영이 사건’ 이후 초등학교 취학 대상 아동이 예비 소집일에 불참하면 학대 여부 확인 작업에 나선다. 하지만 출생 신고도 안 된 ‘투명인간’ 아이의 부모들에게는 취학통지서가 가지 않는다.
 
▼ “병원서 출생 즉시 공공기관에 통보… 신고 기피 막아야” ▼

미등록 아동 방지대책 시급

‘제2의 하은이’를 막기 위해서는 의료기관이 공공기관에 출생 사실을 직접 알리는 ‘출생 통보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뉴질랜드와 호주, 영국 등의 국가에서는 이미 출생 통보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뉴질랜드와 호주에서는 출산을 담당한 의사나 조산사가 아이의 출생 사실을 5∼7일 이내에 출생신고 담당 공무원에게 알려야 한다. 하지만 출생신고는 부모가 직접 한다. 부모는 공공기관을 찾아 정해진 기한 안에 출생신고를 따로 해야 한다. 부모가 출생 신고 기한을 넘기면 공공기관은 부모에게 과태료를 물린다.

독일에서는 부모와 의료기관 모두 아이 출생 1주일 이내에 신고해야 한다. 담당 공무원은 부모와 의료기간 중 먼저 신고한 쪽을 기준으로 출생 등록을 한다. 영국은 정부가 신생아에게 의료보장번호를 부여하고 이 번호를 토대로 아동을 관리한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통계청 조사 결과 2017년 신생아 가운데 병원에서 태어난 아이가 99.6%”라며 “의료기관에서 아동 출생증명서를 공공기관에 보내도록 해 (하은이처럼) 보호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의 수를 줄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송효진 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2011년 유엔 아동권리위원회가 아동인권 보호를 위해 출생신고 제도를 개선하라고 우리나라에 권고했는데 달라진 게 없다”고 지적했다.

출생 통보제가 도입되면 출산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산모들이 병원이 아닌 곳에서 출산하는 경우가 많아져 출산 환경이 열악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2014∼2016년 국회에서 출생 통보제를 담은 3건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폐기된 이유이기도 하다. ‘보편적 출생신고 네트워크’의 이탁건 변호사는 “부모가 출산 사실을 알리기 원치 않더라도 아동은 사회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며 “출생 통보제를 도입한 뒤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출생 사실 통보 때 산모의 이름은 알리지 않아도 되는) 익명 출산제 도입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도예 yea@donga.com·한수아 기자
#신고 여부 확인할 제도 보완#아동 출생신고제도 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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