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中 독립운동의 현장 봉오동-명동촌을 가다
승리의 기억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99년 전 짜릿한 승리의 함성은 골짜기를 넘어 생생히 들리는 듯했다.
한국 독립운동사상 일본 정규군과 싸워 처음으로 승리한 ‘봉오동전투’. 최근 동아일보가 찾은 중국 지린(吉林)성 왕칭(汪淸)현 봉오동에 위치한 봉오저수지 일대는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가 펼쳐진 곳이다. 저수지 댐 위에 오르면 전투 현장이었던 봉오골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산맥 사이로 보인다. 아쉽게도 1970년대 댐이 만들어지면서 승리의 현장을 직접 밟아볼 순 없었다.
○ 최초이자 최고의 승리 ‘봉오동전투’
봉오동전투는 홍범도 장군(1868∼1943) 등이 이끈 연합독립군 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 157명을 사살하고 중상자 200여 명을 만든 전과를 올렸다. 반면 독립군은 전사 4명, 부상 2명에 그치는 압도적 승리였다. 물론 정확한 수는 더 면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게 학계의 판단. 하지만 일제에 치욕을, 독립군에게 희망을 선사한 성과임은 틀림없다.
일제는 봉오동전투에서 대패한 뒤 치졸한 분풀이로 그해 10월 북간도 일대 한인을 학살한 ‘간도 참변’ 만행을 저질렀다. “생으로 매장하기도 하고, 불에 태우기도 하고, 솥에 삶기도 하고…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짓을 저네들은 오락의 일로 삼았다”고 기록한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는 처참한 상황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봉오저수지로 가는 길목에는 당시의 승리를 기억하는 작은 기념비가 있다. 1993년 6월 투먼시 정부가 세운 이 기념비에는 “일본 침략자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 놓았으며 인민대중의 반일 투지를 크게 북돋아줬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2013년 투먼시는 이 비를 대체한 대형 기념비를 새로 건설하며 묘한 문구를 넣었다. “중국 조선족 반일무장이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 아래 처음으로 일본 침략군과 맞서 싸워 중대한 승리를 거두고”라고 기록했다. 마치 중국 소수민족의 역사처럼 표기해 놓은 것이다. 동북공정의 여파가 항일 독립운동 역사 현장에서도 배어나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 윤동주 생가에 그늘진 동북공정
룽징(龍井)시의 명동촌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북간도 독립운동의 중심지이자 항일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가 나고 자란 땅. 명동촌 입구에 위치한 ‘윤동주 생가’에 가보니 ‘조선족 민족시인’이란 설명이 붙어 있다. 그 때문일까. 1994년 복원된 윤동주 생가는 그의 반신상과 시가 적힌 기념비 등으로 정갈하게 정돈됐지만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윤동주 생가에서 명동촌 내부로 200m 정도 들어가면 명동학교가 등장한다. ‘간도 대통령’으로 불린 김약연(1868∼1942)은 1908년 명동서숙을 세웠고, 1910년 3월 명동학교로 확대, 개편해 교장에 취임했다. 명동학교는 1929년까지 졸업생 1200여 명을 배출했다. 대표적인 졸업생으로는 윤 시인을 비롯해 문익환 목사와 송몽규 수필가, 나운규 영화감독 등이 있다. 명동학교의 졸업생 대다수는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사업에 투신해 “독립운동사관학교”로 일컬어졌다.
명동학교 한쪽에는 3·13운동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1919년 3월 13일 룽징 시내에서 일어난 3·13만세시위는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한반도 바깥에서 펼쳐진 가장 큰 규모의 움직임이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이들이 명동학교 학생들과 명동촌 주민들이었다.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새에덴교회 담임목사)은 “북간도 곳곳에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 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홍범도, 김약연, 윤동주 등 위대한 영웅들의 생애를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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