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시작 15분 전. 빈 무대에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다. 무대 위에 부연 안개가 피어올랐다. 홀로그램 영상이 아닌지 의심했다. 정시에 악단이 입장하고 첫 화음이 울리자 여인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21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메조소프라노 조이스 디도나토의 첫 내한공연 ‘전쟁과 평화 속에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독창회’가 주는 선입견을 깨는, 연극적인 연출이었다.
1부 ‘전쟁’, 2부 ‘평화’를 주제로 짜인 프로그램은 격렬한 마음의 동요와 위안을 그리는 바로크 오페라 아리아가 중심이었다. 2016년 말 발표된 같은 제목의 앨범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디도나토의 음성은 균질하면서도 유연하고 적절한 광택을 띠었다. 공명점을 자주 바꾸지 않으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비브라토와 어택(시작음을 들어가는 것)의 예민한 조절로 천변만화하는 분노와 절망, 위안의 색상을 그려냈다. 헨델 ‘아그리피나’ 아리아의 사이렌과 같은 긴 첫 음, 바로크 오보에와 짝을 이룬 기악적 발성은 고뇌하는 영웅을 눈앞에 보는 듯이 묘사해냈다.
무대 위에 장치된 조명과 프로젝터는 벽면에 온갖 추상적인 형상과 강렬한 빛을 쏘아 올렸다. 피와 고통, 위안과 달콤한 바람을 노래하는 바로크 아리아들이 시각적인 감흥의 옷을 입었다. 무용수 마누엘 팔라초는 때로 주인공 마음의 분신으로, 때로는 바람결 같은 자연이나 연인으로 적절히 무대에 개입했다. 바로크의 극적 정신에 가뿐히 다가가도록 하는 섬세한 ‘가이드 투어’였다.
막심 예멜랴니체프가 지휘하는 일 포모도로 앙상블의 반주도 더할 나위 없이 정밀했다. 적당한 볼륨의 포근한 베이스 라인이 주는 화음 연결의 묘미와 목관의 표정 변화가 황금 사과처럼 빛났다.
첫 앙코르곡인 요멜리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의 아리아를 마치고 갈채가 계속 이어지자 디도나토는 마이크를 잡았다. “지난 미 대선 직전에 이 ‘전쟁과 평화 속에서’ 투어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장벽과 고립, 불평등이 계속 심해지는 이 세계를 그냥 보고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우리에겐 어떻게 화합(harmony)을 이룰지 가르쳐주는 ‘예술’이라는 스승이 있습니다. 내일 떠오를 태양을 기대하며 이 노래를 들려드립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근대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곡 ‘내일(morgen)’을 불렀다. 작곡가의 시대와 동떨어진 바로크 합주의 반주로 듣는 느낌은 잔잔하면서도 마음을 격동시키는 마무리를 선사했다. ‘내일, 태양은 다시 빛나리라. 내가 가는 길 위에, 행복한 우리를 내일은 다시 결합시키리라.’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