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의 적폐청산이 거세다. 이미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구치소에 수감됐고 최근에는 전직 대법원장이 그 뒤를 따랐다. 누구든 죄가 있다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속에 서로에 대한 증오가 조금이라도 작용하고 있다면 정부가 바뀔 때마다 피바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정치에서 현 정부는 전임 정부를 존중하고, 전임 정부는 현 정부에 아낌없이 조언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는 것일까. 백용호 전 대통령정책실장(63·이화여대 정책과학대학원 교수)은 “국가적 중장기 과제를 고민해야 한다고 늘 생각하면서도 못 한 게 무척 아쉽다”며 “현 김수현 정책실장은 어떻게 해서든 그런 고민을 할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조차 중장기 정책을 고민할 여력이 없다면 어디서 하나.
“매일 당면하는 현안이 너무 많다 보니 늘 후순위가 되더라. 현안도 중요하지만 긴 호흡을 가진 정책을 고민해야 하는데…. 우리나라가 그런 부분이 많이 약하다. 예를 들면 4차 산업혁명 시대나 저출산같이 긴 호흡이 필요한 문제를 어떻게 대비할 건지 같은…. 꼭 해보고 싶었던 게 다문화 가정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고 세계화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기 위해서는 다문화 가정 문제를 전략적으로 잘 대응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 또 부모의 재력으로 인한 교육 격차 문제도 고민이 필요하고…. 큰 사건이 터지면 청와대 역량이 전부 거기로 쏠리니까 여력을 내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아마 지금 청와대도 비슷할 거다.”
―정책실 일이 그렇게 많은가.
“공정거래위원장부터 시작해서 국세청장, 정책실장까지 하다 보니 피로가 누적된 결과겠지만, 나중에는 걷는데 도로가 눈앞으로 튀어 올라오는 것처럼 보였다. 기가 다 빠진 것인지 잇몸도 다 내려앉고, 머리도 다 빠지고…. 한의원에 갔는데 풍(風) 초기인 것 같다며 닭고기는 먹지 말라고 하더라. 하하하. 그래서 지금도 닭고기는 안 먹는다.”
―전임 정책실장으로서 현 정부 정책에 대해 말한다면….
“정책실장을 하면서 절실히 느꼈는데 정책 성공을 담보하는 건 명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명분과 정치적인 수사에 너무 매달리면 현실과 동떨어지게 되고, 반드시 부작용이 일어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애매한 이름을 사용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본다. 사안의 본질과 상관없이 검증된 이론이냐 아니냐는 소모적인 용어 논쟁에 빠졌으니까…. 그냥 분배를 개선한다고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명박(MB) 정부가 끝난 뒤 ‘역사는 역시 반복되는 것 같다’고 했는데….
“음…, 선거 때 제시한 공약을 다 지킨 정부는 없을 거다. 다 해줄 수 있다, 또는 다 해줘야 한다고 너무 과신하는데 그게 모든 정부마다 반복된다. 그리고 못 지키고….” (정확하게 말하면 정부가 아니라 대통령 아닌가?) “허허허…, 뭐 그렇겠지. 이제는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정부가 나왔으면 한다.” (예를 들면 어떤 건가) “동남권 신공항 같은 것…. 특정 정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모든 정부가 바뀔 때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또 하나는 권력자의 모습인데, 권력을 갖기 전에는 스스로 원칙을 지키고, 거절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일단 권력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면 그걸 지키기가 아주 어렵다. 그런 절제가 없는 상태에서 평소 하던 행동을 하면 아주 불행한 결과가 오는 거지. 그런 경우가 지금 많지 않나.”
―MB 정부의 공과를 평가한다면….
“지금은 잊었겠지만 MB 정부 시절 대외 경제 여건이 무척 안 좋았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는 어쩌면 서방 국가들에는 대공황 이래 가장 큰 쇼크였는데 국민들이 피부로 위협을 못 느낄 정도로 성공적으로 대처했다. 한미 통화 스와프(swap)가 체결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8년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 보호를 신청하면서 전 세계 금융시장이 패닉에 빠졌다. 한국도 정부가 환율 방어 등 갖은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외환위기 문턱에서 이 상황을 진정시킨 것이 한미 통화 스와프였다. 사실상 미국 중앙은행이 보증을 서면서 원화에 대한 신뢰가 회복된 것이다.
―한미 통화 스와프 체결이 어려운 일이었나.
“국제 규정상 통화 스와프를 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는데 우리는 그 기준에 모자랐다.” (어떻게 체결할 수 있었나) “일종의 외교적 노력으로 해결한 건데…. 대통령은 물론이고 많은 공직자들이 노력했고.” (과는?) “국민들이 실망한 부분이 많으니까…. 그 부분은 5년간 MB 정부에서 일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참 착잡하고 무겁다.”
―MB 정부에서 국정홍보처를 폐지한 게 아쉬웠다고 했다.
“정책 홍보를 전문 부처가 책임지고 하는 것과 부처 각자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더 아쉬웠던 건 아주 부드럽게 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는 도구를 없앴다는 점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리처드 세일러의 ‘넛지효과(Nudge Effect)’인데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세금을 잘 낸다’는 사실만 알려도 탈세율이 현격하게 떨어진다. 정부가 강제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홍보만 잘해도 상당한 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홍보처를 없앤 건 너무 성급했다. 물론 당시에는 홍보처가 기자실 폐쇄 등으로 원성을 너무 사긴 했지만….”
―보수가 지금 무척 어려운 상황이다. 보수의 경제관도 바뀌어야 한다고 했는데….
“보수 정치집단은 그동안 쉬운 길을 걸어왔다. 과거 경제성장 실적, 안보와 지역주의에 안주해 수십 년을 버텼다. 그러다 지금 부패 문제로 위기를 겪고 있고…. 지금 위기는 시간만 지난다고 극복되는 게 아니다. 지키기 위해서라도 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이 경제적 불평등과 격차 때문인데 이 담론을 진보의 영역에만 놔둬서는 안 된다.” (보수는 대개 보편적 복지에 각을 세우는데…) “도덕적 해이나 포퓰리즘, 재정 건전성 등을 걱정하는 건데, 그렇다고 해서 복지를 증진시키거나 경제적 불평등을 풀기 위한 과감한 조치들을 더 이상 진보의 영역으로 놔둬서는 (생존이) 어려울 거다.” ―하지만 우리 보수·진보 정당은 거의 이분법적으로 정책을 다룬다.
“정책실장 때 친서민 정책을 제시했더니 내 편, 네 편 할 것 없이 ‘MB 정부가 무슨 친서민 정책이냐’며 비판하더라. 보수는 감세와 기업 규제 완화, 진보는 증세와 복지 증대 이런 식으로 아예 진영을 나누는 거지. 양극화가 심화되면 시장이 지속될 수 없다. 보수가 말하는 시장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친서민 정책을 펴야 한다고 설득했다. 마찬가지로 시장을 위험에 빠뜨릴 정도의 탐욕과 반칙에 대해서는 정부가 더 강력하게 개입해야 한다.” (MB 정부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사면해준 건 시장경제에 대한 반칙 아닌가. 이 회장은 배임과 조세포탈로 유죄를 선고받았고 당신은 당시 국세청장이었다) “음…, 그때 세 번째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에 도전할 때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에게 성공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국민의 열망도 컸지만 이미 두 번이나 유치 신청을 하다 보니 인프라 등 선행된 투자 금액이 굉장히 많았다. 없던 걸로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MB가 고민 끝에 ‘이왕 이렇게 된 바에는 모든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성공하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던 이 회장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비난을 예측하지 못할 리가 없었을 텐데….
“모를 수가 있나. 재벌 특혜다, 법치주의가 훼손됐다 등 상당한 비난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정치적 부담과 세 번째 도전에서는 꼭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 이미 들어간 엄청난 투자 금액 등의 사이에서 결정한 건데…, 굉장히 고민스러운 결정이었지만 다른 국가적 이익을 위해 (법치 훼손을) 용인한 건 사실이다.” ―정부가 각종 제재로 지나치게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있다.
“보수 진보를 떠나 기업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이란 걸 모르는 정부가 어디 있겠나. 그런데 대기업 집단들은 그런 제재가 왜 나오는지 근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정치권은 국민의 마음을 읽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국민들의 반기업 정서가 강하기 때문에 그런 제재들이 나오는 거다. 3세, 4세로 넘어가면서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는 행위가 너무 많이 나오고 있지 않나. 반기업 정서가 왜 생겼는지 재벌들이 고민하지 않으면 정권을 가리지 않고 대기업에 대한 제재 문제가 계속 거론될 거다. 상속도 그렇다. 경영에 관심이 없고 다른 걸 더 잘하는 자녀에게까지 굳이 무리하게 물려줄 필요는 없지 않나. 회사로도, 사회적으로도 너무 위험한 행동이다.”
―공과를 떠나 한 정부의 경제 정책 전반을 이끈 사람으로서 해줄 말이 있나.
“정책을 한 사람으로서 후임자들이나 그들의 정책을 비판하는 건 참 어렵다. 그 고충을 아니까…. 정책 결정 과정에 있는 사람은 굉장히 외롭다. 어떤 선택을 해도 반대가 있고,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정책이 성공을 해도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은 영원히 기억한다. 그래서 굉장히 외롭고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다. 그런 생각을 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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