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의 명문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등 독립운동가 10명을 배출한 고성 이씨 임청각파 종가의 명절 차례상은 조촐하다. 과일과 포, 국 등으로 소박하게 마련한다. 1744년부터 전해오는 집안 문서에 담긴 ‘제사상은 간소하게 차릴 것’에 따른 오랜 전통이다. 임청각파 종가는 고조부에 이르는 4대의 기일 제사도 광복절 오전 한꺼번에 지낸다.
동아일보가 지난해에 이어 연재 중인 ‘새로 쓰는 우리 예절 신(新)예기(禮記)’는 신구(新舊) 예법의 조화와 실천을 보여준다. 500년 종갓집인 임청각파의 명절과 제사 풍경은 명문가일수록 허례허식보다 조상을 경애하는 마음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지난해 추석, 신예기에서 소개된 퇴계 종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제사상은 간소하게, 추석 차례상은 아예 차리지 않았다.
유서 깊은 문중에서 전통의 고루한 답습이 아니라 시대에 발맞춰 유연한 변화를 선택한 것은 공통적으로 집안 어른들이 열린 마음으로 앞장선 덕분이었다. 차례와 제사 간소화 역시 ‘형식’보다 ‘정성’이 중요하다는 선조의 가르침에 충실한 선택이었다. 명절증후군이란 말이 암시하듯, 누군가의 일방적 노동과 희생을 전제로 하는 가부장적인 예법과 명절이라면 대대손손 이어갈 수 없다.
종갓집의 실제 사례가 보여주듯 애초부터 예절이나 전통에 정형화된 원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특정한 시점에 굳어진 풍속이 있을 뿐이다. 가령, 전을 올리는 것은 제사상에 기름을 쓰는 음식을 올리지 않는다는 유교의 전통에 부합하지 않는다.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枾) 같은 제사음식의 배치 규칙도 근거 없는 얘기로 드러났다. 차례나 제사를 지낼 때 겉치레보다 예법의 본질에 대한 성찰, 조상을 기리는 마음이 더욱 소중한 까닭이다. 이번 설은 조상을 기억하고, 온 가족의 화목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며 진정한 명절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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