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지하실. 이곳은 운동권 학생들에게 암암리에 알려진 최고의 아지트다. 벽 뒤편으로는 숨을 수 있는 별도 공간이 있는 데다 함께 읽고 토론할 수 있는 불온서적도 가득하다. 데모에 사용할 전단과 화염병도 만들 수 있다.
연극 ‘더 헬멧: 룸 서울’은 시위에 참가한 학생을 찾으려는 백골단원들이 이 지하실에 들이닥치며 시작된다. 지하실 소유주인 서점 주인은 학생들을 벽 뒤에 숨겨주고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비밀 공간은 결국 발각되고, 벽 밖으로 끌려나온 학생들은 백골단의 곤봉에 힘없이 쓰러진다. 극 후반부에는 학생들을 벽 뒤에 숨겨 보호하려는 대학생 백골단원과 상사 사이의 팽팽한 긴장도 그려진다.
지하실은 벽에 의해 분리되거나 합쳐지며 다층적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등장인물들은 벽으로 가로막혀 상대를 바라보지 못할 땐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지만, 벽이 열려 서로 마주한 후에는 상대가 자신과 같은 평범한 시민임을 알면서도 폭력을 휘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작품은 그 시대를 살아가던 모두가 구조적 폭력에 희생당하는 피해자임을 역설한다. 저마다 ‘빨갱이를 잡기 위해’ ‘선배가 술을 사준다고 해서’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지하실을 찾은 인물들은 ‘이 일이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치지만 이는 끝내 이뤄지지 않는다.
객석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접하도록 한 구성이 돋보인다. 벽이 열릴 때 관객은 하나의 대사와 이야기를 접하지만, 벽으로 공간이 나눠지면 객석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접한다. 다만 무대 두 개의 방음 시설이 완전하지 않아 각 무대의 대사, 소리가 뒤섞여 혼란스러운 순간도 있다. 김태형 연출가는 “무대가 완벽히 구분되지 않는 점은 아쉽지만 연극적 약속으로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우들의 외침과 현장음, 배경음악이 뒤섞여 관객이 극중 상황 속에 함께 놓여 있는 느낌을 준다. 이호영 이정수 한송희 등 출연. 2월 27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전석 3만 원. ★★★★(★ 5개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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