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조선총독부의 학생시위 탄압
학무부-관립학교 통해 구조적 압박… 학교 직원들 직접 시위현장 파견도
학생들이 동맹휴학하자 감시 강화… 만세시위 참가 교원도 징계-휴직
“무단 결석자 및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않는 자는 퇴학에 처한다.”
1919년 3·1운동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각 학교에 내린 처분 방침 가운데 하나다. 결석한 학생은 퇴학시키라는 지시다. 그동안 3·1운동 탄압 연구가 헌병경찰과 군대 등에 주로 초점이 맞춰졌던 가운데 조선총독부가 만세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학교에서는 어떻게 탄압했는지에 주목한 연구가 나왔다.
최우석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은 29일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연구발표회에서 ‘3·1운동에 대한 학무국과 학교의 대응’을 발표했다. 최 연구원은 일제강점기 ‘조선 소요사건 공로자 조사철’ 등의 자료를 검토해 시위를 구조적으로 탄압했던 시도를 밝혔다. 이 자료는 조선총독부가 3·1운동과 이후 학생운동 탄압에 앞장선 학무국원, 관립학교 교원을 포상하고자 만들었다.
총독부가 각 학교에 내린 처분 방침은 강경했다. 총독부는 유죄 판결 확정 학생은 퇴학, 구류 중인 학생은 정학시키라는 방침뿐 아니라, 등교하지 않은 학생도 졸업·진급 불가 및 퇴학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최 연구원은 “특히 1919년 9월 이후에는 처벌 강도를 더욱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만세시위에 참가한 교원 역시 징계에 회부하거나 고소·고발 시 우선 휴직시키도록 지시했다. 유죄가 확정되면 해직하고 학무국과 각 도장관을 통해 명단을 공유하는 한편 향후 교직원 채용에서 배제하도록 했다.
최 연구원은 이 같은 조치가 관·공립학교에서 우선적으로 집행됐을 것으로 봤다. 관립학교 교장, 각 학급 주임, 기숙사 사감 등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독립운동에 나서는 걸 막고자 학생을 설득하는 한편 일상을 감시했다. 학생들이 만세시위에 쏟아져 나가자 직원을 시위 현장에 파견하거나 주도 학생을 경찰에 이첩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돌입한 뒤 관립학교들은 휴교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기간에도 시위 참여를 막으려는 회유는 계속됐다. 교원들은 집에 돌아간 학생들을 방문해 등교를 설득했다. 학부형을 통해 학생을 압박하기도 했다. 졸업이 임박한 학생들이 졸업시험과 졸업식을 거부하자 한 명씩 회유하기도 했다.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는 1919년 3월 말부터 학생을 한 명씩 불러 만세시위 참여 여부를 조사한 뒤 졸업증서를 줬다.
관립학교들은 1919년 3월 상순부터 짧게는 며칠, 길게는 80여 일이 지난 뒤 수업을 재개했다. 6월 이후 경성의학전문학교와 평양고등보통학교 등은 동맹휴학과 만세시위를 막기 위해 학생들의 임시 기숙사 생활을 강요하고 통제와 감시를 강화하기도 했다.
탄압은 사립학교로도 확대됐다. 총독부는 1920년 3·1운동 1주년 만세시위 당시 배재학당, 숭덕학교, 숭현여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가 당국에 협력하지 않는다며 외국인 교장 3명의 취직 인가를 취소했다. 최 연구원은 “3·1운동 뒤 1920년대를 ‘동맹휴학의 시대’라 부를 정도로 학생들은 수많은 동맹휴학을 벌였다”며 “조선총독부의 학생운동 통제, 탄압의 원형도 3·1운동 당시 형성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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